우리는 러시아 혁명의 당이다
우리는 2007년 11월 10일 LA에서 있었던 러시아 혁명 90주년 기념식에서 빅터 기본스 동지가 했던 발표를 출판에 맞게 편집하여 아래에 싣는다.
국제공산주의동맹을 여타 좌익들로부터 갈라놓는 심대한 정치적 차이는 다음의 한 선언으로 요약될 수 있다: "우리는 러시아혁명의당이다." 우리는 페트로그라드의 붉은 프롤레타리아트가 그들의 첫 번째 기념식을 했을 때와 똑같은 심정으로 “세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사건”으로서 볼셰비키 혁명 90주년에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러시아 혁명은 인류 문명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남아있다: 만약 자본주의의 죽음의 단말마로부터 벗어나 공산주의 사회로의 이행에 착수하고자 한다면, 노동자와 노동대중들이 반드시 따라야 할 길.
미국 트로츠키주의의 창설자이며 역사적인 지도자인 제임스 P. 캐넌은 1939년 그의 "러시아 문제에 대한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17년 11월 7일 러시아의 볼셰비키들은 결정적으로 노동자 혁명의 문제를 추상의 영역에서 현실로 가져와 그것에 살과 피를 부여했다...
"10월 혁명은 세계 전역에서 사회주의를 일정에 올렸다. 10월 혁명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혼란으로부터 세계의 혁명적 노동운동을 되살려 구체화하고 발전시켰다. 러시아 혁명은 노동자 혁명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예증을 통해 실천적으로 보여주었다. 러시아 혁명은 당의 역할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러시아 혁명은 노동자들이 어떤 종류의 당을 가져야만 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1917년 혁명에 관한 보다 확장된 토론을 위하여, 노동자 전위 874, 875, 877, 879호 (2006년 8월 4일, 9월 1일, 9월 29일, 10월 27일자)에 있는 레온 트로츠키의 러시아 혁명의 역사(1932년)에 관한 4개의 교안들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러시아 혁명의 과정 동안에, 자신의 뒤로 농민과 피억압 민족들을 조직하면서 다민족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소비에트라는 그들 자신의 새로운 계급 권력의 기관들을 건설했다. 과거의 자본주의 국가를 분쇄하면서, 볼셰비키의 지도하에서 이들 기관들은 새로운 노동자 국가의 기초를 만들었다. 노동자들의 전위는 그들이 러시아에서 단지 권력을 장악하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 사회주의 혁명의 첫 번째 장을 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유럽 전역에서 노동자들의 봉기들을 고무했으며, 제국주의의 식민지 노예들의 반란들을 고무했다.
1917년 10월의 전율은 세계 전역으로, 제국주의의 가장 부유한 요새인 바로 이곳으로까지 확대되었다. 1919년 볼셰비키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CI)를 창립했다. 볼셰비키 지도자들인 레닌과 트로츠키의 지도하에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과 소비에트 국가는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 결집된 어떠한 조직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혁명적 세력이 되었다.
10월 혁명은 4년 동안의 내전뿐만 아니라 지역의 자본가 똘마니들과 동맹을 맺은 14개 자본주의 열강의 군대의 침공으로부터의 승리로부터 출현했던 적군을 창설했다. 소비에트 정부는 자본가들을 몰수했고, 외국 은행들에 대한 짜르 시대의 엄청난 부채에 대한 지급을 완전히 거부했다. 소비에트 정부는 사회주의 사회 건설의 첫 걸음으로서 일자리들, 의료보장, 주택과 교육에 대한 노동인민들의 권리를 선포했다.
소비에트 정부는 농민들에게 토지를 주었고 짜르 시대 인민감옥에 있던 많은 피억압 민족들에게 자기 결정권을 부여였다. 소비에트 정부는 러시아의 모든 가부장적 봉건주의 체계를 분쇄했다. 초기 소비에트 정부는 교회와 국가를 분리했을 뿐만 아니라, 가용한 모든 자원들을 보편적인 비종교적 교육과 과학에 투여했다. 소비에트 정부는 민족적, 인종적 소수자들, 여성과 동성애를 차별하는 모든 법들을 제거했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서구 제국주의자들이 투표권을 요구하는 여성들에 대하여 피비린내 나는 폭행을 하고 있던 때에 여성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했을 뿐만 아니라, 볼셰비키는 공장 운영자들, 국가 인민위원들과 군 지휘관들로서 프롤레타리아트 지배의 전방에 여성들을 배치했다.
소비에트 노동자 국가는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와 생산에서의 무정부성에 대한 국유화된 소유와 계획경제의 우월성을 입증했다. 짜르 시대 러시아로부터 물려받았던 역사적인 빈곤, 제국주의자들의 침공에 의한 파괴, 제국주의에 의한 지속적인 경제적 군사적 포위와 스탈린주의자들의 오경영과 기생주의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비견될 수 없는 현대화와 성장을 성취했다. 동시에, 자본주의 세계가 1930년대 대공황의 심연으로 떨어졌을 때, 소비에트 계획경제는 수천만의 소비에트 노동자들과 농민들이 러시아의 중세적 공동체를 극복하도록 했으며, 이들을 교육받은 현대 프롤레타리아트, 과학자, 산업 책임자, 그리고 기계화된 적군 지휘관들로 변모시켰다.
소련은 쿠바에서 동유럽, 중국, 베트남, 북한에 이르는 국가들에서 자본주의 지배의 전복을 가능하도록 만들어내고 지켜냈던 산업과 군사력의 발전소였다. 만약 소련이 없었다면, 제국주의자들은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 북한, 중국, 베트남을 핵무기로 공격했을 것이다. 1991-92년 소련의 파괴와 소련과 동유럽에서의 자본주의 복구는 지구의 정치적 지형을 바꾸었으며, 오늘날 전반적으로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투쟁들을 더 이상 사회주의라는 목적과 연관시키지 않는 지경으로까지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을 후퇴시켰다. 자본주의 반혁명은 평균수명의 비극적인 하락과 융합된 치솟는 빈곤율, 질병과 함께 구 소련 전역에서 전대미문의 경제 붕괴를 야기했다. 국제적으로 제국주의자들의 야심에 대한 균형세력으로서의 소련의 부재로 인해, 제국주의자들은 세르비아에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의 군사력을 투입하는데 아무런 부담을 갖지 않게 되었다.
부르주아지 계급은 항상 10월 혁명을 산처럼 많은 거짓말들에 묻어 역사의 기억으로부터 제거하고 싶어했다. 그들은 10월 혁명을 음모나 쿠데타로 종종 부른다. 그러나 1917년 10월 혁명은 쿠데타나 우연이 결코 아니었다. 지구의 사회적으로 조직된 생산력들이 부르주아지의 사적 소유양식들과 부르주아지 민족국가들 역시 괴롭히고 있었기 때문에, 혁명은 필요했던 일이다. 이런 것들이 사회적 진보에 족쇄가 되었다. 1914-18년 1차 제국주의 세계대전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사회적 생산력, 문명, 그리고 인류 그 자체에 대한 야만적 파괴로의 전락을 의미했다. 1차 대전은 자본주의 제국주의의 죽음의 지배로부터 지구의 생산력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역사적 관점에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일정에 올라야만 함을 보여주었다. 10월 혁명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자신들의 역사적인 임무에 대하여 이해하도록 교육할 수 있었던 당에 의하여 조직되고 지도되었기 때문에 발생했던 것이다.
자본주의 제국주의는 여전히 자신의 치명적인 모순들에 빠져있다; 자본주의는 여전히 부르주아지 계급을 타도할 사회적 힘을 가진 프롤레타리아트를 창출하며, 자본주의는 노동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생존을 위하여 투쟁하도록 강요한다. 우리의 임무는 올바른 때와 장소에 레닌의 그것과 같은 당이 존재할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발제는 단순히 1917년 러시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가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10월들을 만들기 위한 ICL의 투쟁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전쟁과 혁명
1917년 2월 러시아에서의 혁명의 발발에 대한 즉각적인 배경은 1차 세계대전이었다. 이 전쟁은 레닌의 사고에 깊은 충격을 주었다. 전쟁은 제2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의 붕괴를 촉발했다. 1914년 8월 4일부터 시작하여, 제2 인터내셔널에 가입되었던 대다수의 당들이 자기 자신의 부르주아지 계급의 전쟁동원의 편에 섰다. 볼셰비키가 전쟁을 노동자 혁명을 재촉하기 위하여 활용한다는 인터내셔널의 앞서의 결의들을 실천하려고 하는 얼마 되지 않는 소수 속에 있음이 밝혀졌다.
과거 인터내셔널의 붕괴는 레닌으로 하여금 러시아에서 그의 멘셰비키와의 분리를 일반화하도록 했다. 이 분리는 1903년 당원의 정의에 대한 투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직후에 짜르 타도 이후의 소위 지도부로서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 계급에 대한 멘셰비키의 지지를 볼셰비키가 거부하면서 차이들은 더욱 커졌다. 분리는 1912년이 되면서 최종적인 것으로 되었다.
레닌은 1차 세계대전으로부터 노동자 운동 내부의 기회주의는 같은 당 내부에서 극복되어 질 수 있는 퇴화되고 특정 지역에 제한된 현상이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그는 제2 인터내셔널은 파괴되었으며 새로운 혁명적 인터내셔널이 철저한 애국주의적 민족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사이비 맑스주의 주장들을 사용함으로써 애국주의적 민족주의자들에게 덮개를 만들어주던 중앙주의자들과의 완전한 분리를 통해서 건설되어야만 한다고 결론 내렸다. 당시 그런 중앙주의자의 전형이 독일 사민당 칼 카우츠키였다.
전쟁이 자본주의가 붕괴의 마지막 국면에 있음을 증명하며, 프롤레타리아트 사회주의 혁명이 계속되는 야만주의로의 전락으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을 제공한다고 레닌은 주장했다. 그는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으로 가는 길은 제국주의 전쟁의 혁명적 내전으로의 전화이며, 사회주의자들이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부르주아지 국가의 전쟁에서의 패배를 지지해야만 한다는 것이 이것을 위한 조건이라고 주장했다. 레닌의 정책들은 사태들의 혁명적 진전이 올 것이라는 것을 현명하게 예견했고, 그것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필요한 강령을 보여주었다.
(구력으로) 1917년 2월 23일 국제 여성의 날에 러시아의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 1차 세계대전에 의해 격화되었던 사회적 긴장들이 폭발했다. 대부분 여성 섬유 노동자들의 파업은 빵과 전쟁 배급들을 요구했다. 훨씬 더 많은 노동자들이 가두투쟁에 합류하면서 1000명이 넘는 사상자가 나왔고, 25일에는 총파업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2월 혁명의 시작이었다. 러시아 전역에서 경찰과 국가 관리들이 쫓겨났고, 2월 27일 노동자와 병사 대표자들의 소비에트가 조직되었다. 공장들과 군대에서의 소비에트 선거는 1905년 혁명에서 노동자들의 경험을 반영했다. (2006년 6월 9일자 노동자 전위 872호에 있는 1905년 러시아 혁명에 관한 발제문에서 내용을 읽을 수 있다).
여기서 잠깐 "소비에트"의 정의에 관하여 정리해보자. 소비에트들은 노동현장들과 군대의 부대들로부터 선출되는 대표자들의 위원회들, 노동계급의 기관들이었다.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대표자들을 선출했고, 그들을 적극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고,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언제든 그들을 소환할 수 있었다. 소비에트들은 투쟁, 봉기,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 행정의 기관들이었다.
그러나 전제가 노동자들에 - 그들 중 다수가 여러 해 동안 볼셰비키에 의해 단련되었다 - 의해 타도되었지만, 등장했던 공식적인 정부는 부르주아지의 정부였다는 것이 2월 혁명의 모순이었다. 페트로그라드에서 시가전이 한창이던 때조차, 부르주아-전제주의 정치인들로 구성되었던 스스로 임명된 임시 위원회는 2월 27일 밤 토리드 궁전에서 인민들의 혁명을 뒤로 한 채 몰래 만났다. 그들은 임시정부가 입헌군주제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볼셰비키와 노동자들은 여전히 거리에서 짜르의 경관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던 반면, 한 도당이 토리드 궁전의 다른 세력들에게 달려가 스스로를 페트로그라드와 전러시아 소비에트의 지도부로 임명했다. 이들은 멘셰비키와 사회주의혁명당(SRs)의 지도자들이었다. 사회주의혁명당은 주로 농민에 기반을 두고 있었던 반면, 멘셰비키는 도시 소부르주아지 층들과 보다 보수적이고 특권을 가진 노동자들을 대변했다. 멘셰비키와 사회주의혁명당의 강령은 부르주아지 계급이 지도하고 지배해야 하는 것이었으며, 그들은 필사적으로 부르주아지 임시정부가 권력을 장악하기를 호소했다.
그렇게 해서 2월 혁명은 이중권력 상황으로 귀결되었다. 즉, 부르주아지 계급의 임시정부와 나란히 노동계급에 기반을 두고 노동계급에 응답하는 노동자와 병사 대표 소비에트가 존재했다. 이 상황은 지속될 수 없었다. 한 계급 혹은 다른 계급이 지배해야만 할 것이었다.
레닌과 볼셰비키
볼셰비키의 내부 삶은 지속적인 논쟁들의 장이었다. 그리고 1917년의 과정에서, 레닌과 볼셰비키 지도자 카메네프, 지노비에프 그리고 스탈린의 주변에 중심을 두고 있던 보수적 세력 사이에 투쟁이 다시 발생했다. 그리고 우리가 보게 될 것처럼, 후자의 3명은 10월 혁명 이후에 다시 뭉쳤다.
레닌은 4월 3일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왔을 때, 그들과의 결정적인 투쟁에 임했다. 여전히 스위스 망명지에 갇혀있었지만, 그는 카메네프와 스탈린의 임시정부에 대한 "조건적" 지지에 관하여 경각심을 키우면서 당 기관지 프라우다를 읽고 있었다. 그들은 레닌의 전쟁에서의 혁명적 패배주의를 기각했고, 임시정부가 협상을 하여 전쟁을 종결하도록 압력을 행사하게 한다는 핑계로 다양한 멘셰비키의 방어주의를 채택했다. 그들은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통합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르포프 왕자의 정부에 대한 의회적 압력 그룹이라는 멘셰비키의 신기루를 향해 당을 몰아가고 있었다!
마침내 페트로그라드에 있는 핀란드 역에 도착하자, 레닌은 짜르를 타도했던 환호하는 군중들에게 연설을 하기 위하여 장갑차의 꼭대기에 올라섰다. 레닌은 그들을 환영했으며, 전쟁을 지지하던 공식 소비에트 환영위원회의 충격적이게도 독일 군국주의와 이를 지지해던 사이비 사회주의들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혀있던 독일의 혁명적 맑스주의 지도자 칼 리프크히트에 대한 국제주의적 경의를 다음과 같이 표했다: "우리의 칼 리프크네히트 동지의 요구에 응하여 인민들이 자신들의 자본주의 착취자들에 대항하여 그들의 무기를 들게 될 때가 멀지 않았다.... 전세계 사회주의 혁명 만세!"
이것은 당을 재무장하기 위한 레닌의 투쟁의 시작을 알리는 총성이었다. 그는 자본가 임시정부와 임시정부의 제국주의 전쟁에 대하여 지지를 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관하여 단호했다. 이것은 조직분리의주제였다. 그는 일인 소수파였지만, 자신의 강령이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들의 필요들에 조응하는 것임을 알았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장악이라는 레닌의 강령은 이미 대중들 자신의 투쟁들에서 형성되고 있었다.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화시켜라!"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들로!"와 "전쟁을 분쇄하자!"라는 볼셰비키의 기치들에 구체화된다. 레닌으로 하여금 당을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장악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돌려놓을 수 있게 했던 것은 4월 말 그가 프롤레타리아트 주들과 수도의 산업지구들로부터 결정적인 지지를 조직한 것이었다.
우리 스파르타시스트가 "분리주의자들"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혹은 "단결, 단결"이라는 설교를 들을 때마다 "레닌은 부르주아지 정부와 제국주의 전쟁을 지지하는 자들과 함께는 노동자 혁명을 지도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국가와 혁명
1917년 동안 레닌의 위대한 성취들 중에 하나가 국가에 대한 맑스와 그의 평생의 동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가르침들을 되살리고 방어한 것이었다. 7월에, 정부의 제거부대를 피해 피신 중일 때, 레닌은 팜플렛 국가와 혁명을 완성하는 것에 자신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나날들을 바쳤다. 그는 부르주아지 계급은 자신의 독재를 감추기 위하여 거짓말들을 사용하지만, 맑스주의자들은 국가들이 계급들의 상위에 존재하는 중립적 조정자들이 아니라는 진실을 말해야만 한다고 썼다.
엥겔스는 국가의 핵심을사회에 대한 폭력을 독점하고 있는 무장한 자들의 기관들, 감옥들, 그리고 경찰로서 정의했다. 이들 도구들은 특정 계급들의 사회적 지배를 위한 전쟁들과 혁명들에서 건설되었다. 이들 사회적 계급들은 사회의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권에 의하여 정의된다. 그래서 모든 국가는 생산수단에 대한 특정 계급의 소유양식들의 지배를 위한 기구이다. 현대 사회에는 오직 두 개의 근본적인 계급들이 있다: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부르주아지 계급과 단지 자기 자신의 노동력만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정의되는 프롤레타리아트. 자본가들에게는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가 필요하지만, 노동자들은 생산수단에 대한 사회화된 소유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자본가들과 노동자들의 이해는 절대적으로 상반되며, 하나의 같은 국가에서는 충족될 수 없다.
레닌은 또한 부르주아지 계급의 계급독재의 기관들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복무하도록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맑스의 사상은 노동계급은 반드시 '기존의 국가 기구'를 해체하여 분쇄해야만 하며, 스스로를 단지 그것을 유지하는 것에 한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구 부르주아지 국가로부터 독립적인, 그리고 그것에 맞서 적극적으로 투쟁하는 공장위원회들, 노동조합들, 붉은 근위대들, 노동자 민병대들, 병사위원회들, 그리고 혁명적 소비에트들와 같은 것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국가권력의 기관들을 세워야만 했다. 이런 것들이 1917년에 건설되었고, 노동자들의 국가권력에 대한 혁명적 장악 이후에는 새로운 종류의 국가의 기초들 즉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되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계급 지배의 영속화가 아니라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 그래서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주의 사회로의 이행을 목적으로 한다는 측면에서 기존의 모든 국가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권력이었다.
계급 협조에 맞선 볼셰비키의 투쟁
첫 번째 임시정부는 증오 받던 제국주의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그들의 서약에 반발하는 정치적 분노의 대폭발 속에서 무너졌다. 새로운 내각이 5월 5일 구성되었고, 이번에는 사회주의 혁명당과 멘셰비키 소비에트 지도자들이 자본가 정부에서 장관직들을 맡았다. 트로츠키는 후에 이 러시아 연합정부를 "인민전선의 가장 훌륭한 역사상의 예"라고 말했다. 인민전선은 자신들의 연합정부라는 배신행위를 명명하기 위하여 스탈린주의자들이 1930년대부터 사용하게 되는 이름이다. 인민전선은 또한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 좌익연합, 인민연합, 3각동맹.
이러한 계급협조는 전술이 아니라 최악의 배신이다. 노동자의 당이 자본가 정당들과 함께 참여하는 어떠한 정치적 연합도, 그것이 정부이건 야당이건, 부르주아지 질서를 위반하지 않겠다는 배신적인 노동계급 지도자들의 서약이다. 그것은 노동자의 당이 부르주아지적 사회질서의 치안을 유지하는 것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지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연합정부에 대응하여 "10명의 자본가 장관들을 타도하자!"라는 슬로건을 만들었다. 이것은 자본가들과의 연합을 깨는 것과 노동자와 병사 소비에트들이 모든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렇게 하는 것에 대한 멘셰비키와 사회주의 혁명당의 거부는 여전히 그들을 따르던 러시아의 노동자, 병사, 농민 대중 앞에서 그들을 폭로했다.
6월에 연합정부는 전쟁에서 새로운 공세를 시작했다. 이것이 7월 페트로그라드 프롤레타리아트와 근처에 있던 크론슈타트 해군기지의 수병들이 소비에트 지도자들이 증오스러운 전쟁을 끝내고 권력을 잡을 것을 요구하는 3일 동안의 무장시위를 할 수밖에 없도록 했다. 볼셰비키는 섣부른 파국을 막기 위하여 노력했으나, 위력동원을 자제시킬 수 없게 되자 지도력을 제공하기 위하여 최전선에 섰다.
페트로그라드 자본가들의 반응은 전선으로부터 반동적 군대들을 불러들이는 것과 테러 통치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심지어 이것조차 볼셰비키를 멈추게 하지 못하자, 8월에 부르주아지 계급은 소비에트들을 완전히 분쇄하기 위하여 군 총사령관인 장군 코르닐로프에 의한 군사 쿠데타를 결심했다. 화해주의적 소비에트 지도자들은 무력화되었지만, 대중들은 볼셰비키가 조직했던 공동전선 실천의 주변으로 집결했고, 즉시 코르닐로프를 멈추게 하였다.
코르닐로프는 소비에트들과 함께 임시정부 모두를 일소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코르닐로프를 중지시키기 위한 투쟁에서, 볼셰비키들은 임시정부를 방어했지만, 이것은 엄격하게 군사적인 방어였다. 볼셰비키는 임시정부에 어떠한 정치적 지지도 결코 주지 않았다. 반대로, 노동자들과 수병들은 반혁명적 위협에 맞서 투쟁을 조직했던 한편, 볼셰비키는 코르닐로프와 끊임없이 연락을 주고받던 임시정부에 있는 멘셰비키와 사회주의 혁명당 배신자들을 폭로했다.
9월이 시작되면서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았다. 볼셰비키가 지도했던 코르닐로프에 맞섰던 투쟁을 통하여 대중들은 구 소비에트 지도자들은 필요가 없고 볼셰비키만이 오직 전쟁을 끝내고 경제에 대한 자본가들의 사보타지를 멈출 수 있는 결정적인 실천을 할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군 지도자들은 이제 더 이상 혁명적 페트로그라드에 대항하기 위하여 군부대들을 동원할 수 없었다. 지방은 돌아오는 농민 병사들이 지주들의 토지를 장악하고 호화재산을 불태우면서 불타올랐다. 9월 4일 트로츠키가 감옥에서 석방되어 23일에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에 선출되었다. 볼셰비키가 결국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들에서 안정적인 다수를 획득했다. 트로츠키는 "전국에서 혁명적 권력을 위한 직접적이고 공공연한 투쟁 만세!"라고 선언했다. 레닌은 계속 투쟁하여 권력을 장악하라!라고 되풀이하여 역설했다.
당, 소비에트 그리고 권력장악
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10월 10일과 16일 봉기를 결론내리기 위하여 모였다. 두 번의 회합들에서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는 봉기에 반대했지만, 레닌과 트로츠키 쪽이 봉기를 지지하는데 있어서 다수를 획득했다. 모든 곳에서 공장의 붉은 근위대들은 훈련을 하고 있었고, 무기 공장들의 노동자들은 노동자 민병대들에게 직접 무기가 흘러들게 했고, 스몰니 학교에 있던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와 볼셰비키 본부는 노동계급 조직이 붐비는 장소가 되었다.
10월 18일 카메네프와 지노비에프는 공공연하게 신문에 봉기에 관하여 호각을 불었다. 레닌은 그들을 파업파괴자라고 불렀고, 그들의 축출을 요구했다. 트로츠키가 그의 1924년 저작 10월의 교훈에서 설명하였듯이, 봉기 수순 밟기와 같은 급격한 전환들은 당 속의 잠재적인 보수적 경향들이 반대파가 되도록 추동한다. 트로츠키는 볼셰비즘의 본질을 "프롤레타리아트가 무기를 들고 권력을 장악하도록 할 수 있도록 하는 훈련과 단련,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 전위의 조직"으로, 그리고 사회민주주의(멘셰비키) 경향에 대해서는 "부르주아지 사회의 틀 내에서의 개량주의적 반대 활동에 대한 수용과 합법성에 대한 순응 - 즉, 부르주아지 국가의 불가침성으로 대중이 물들게 하기 위한 대중들에 대한 실질적인 훈련 -" 으로 정의했다.
우리가 보았듯이, 소비에트들 그 자체는 권력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소비에트는 다른 강령들과 지도부들에 복무 할 수 있다. 트로츠키가 썼듯이, "당이 없이는, 당과 분리되어서는, 당의 머리 위에서는, 혹은 당을 대체하는 조직을 가지고서는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은 승리할 수 없다."
봉기는 10월 25일, 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 전날에 발생했고, 레닌은 대중들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평화, 토지, 그리고 노동자의 권리에 관한 선언들을 낭독했다. 겨울궁전에서 저항하던 정부를 향한 적군의 해군 함포 소리가 볼셰비키의 선포들에 구두점을 찍었다. 레닌은 "러시아 인민들이 혁명을 시작했고, 독일 인민들이 혁명을 끝까지 완성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그는 또한 "새로운 국면은 러시아에서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서 개시되었다."고 말했다.
혁명의 고립과 스탈린주의적 퇴행
전쟁으로 파괴된 유럽의 노동자 대중들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예에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대중적인 개량주의적 노동자 당들의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은 자본주의 질서를 보존하고자 했으며, 10월 혁명을 목졸라 죽이고 싶어했다. 이러한 반역행위에 의해 무력화된 유럽의 봉기 노동자들은 혁명적 투쟁들이 패배했던 핀란드(1918년), 독일(1918-19년), 헝가리(1919년), 그리고 이탈리아(1919-20년)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하려던 그들의 시도들에 실패했다. 부족했던 것은 노동자들을 자본가 지배를 방어하던 사회민주주의와 민족주의자에 승리로 지도할 수 있었던 볼셰비키 당과 같은 강령에 기초한, 전투를 통한 검증을 거친 혁명적 정당들이었다.
결국 소비에트 내에서 적군이 모든 제국주의의 지원을 받던 군대들과 국내의 백군들을 쫓아냈으나, 나라는 내전으로 인해 기진맥진하게 되었고, 모든 힘이 고갈되었다. 볼셰비키의 공산주의적 목적들과 존재하는 물질적 부족과 결핍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산업이 파괴되었을 뿐만 아니라, 10월을 성취했던 힘찬 프롤레타리아트는 실질적으로 존재하기를 멈추었다. 광대한 부분의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는 어둡고 얼어붙은 유령 도시들 같았다. 러시아의 처참한 기반시설을 재건하는 것을 돕기 위한 소비에트 유럽으로부터의 물질 자원들의 유입은 고사하고, 기근이 소비에트 러시아를 휩쓸었고, 이것은 시골에서의 식인에 이르러 정점에 다다랐다.
짜르즘으로부터 물려받은 물질적, 문화적 빈곤으로 인하여, 볼셰비키들은 일찍이 남아 있던 종종 출세를 위하여 새로운 정권을 위해 일했던 과거의 공무원들, 기술 전문가들과 군 장교들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1922년 3월 레닌은11차 당대회에서 "모스크바에 있는 ‘4700명의 책임감 있는 공산주의자들'이 국가 기구를 관리한다. '누가 누구를 지도하고 있는가? 나는 공산주의자들이 지도하고 있다고 동지들이 말할 수 있는지 심각한 회의가 든다'"(1936년 트로츠키의 배반당한 혁명에서 인용됨)로 경고했다.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전반적인 궁핍의 와중에 자신들의 특권을 확보하고 있던 갓 태어난 보수적이고 관료화된 층이 성장했었고, 이들은 용납되지 않는 계급적 이해와 보수적인 정치 풍조들을 볼셰비키 당 자체로 전달하는 전동벨트가 되었다.
이런 조건들 속에서 볼셰비키 당의 혁명적 중핵들이 스탈린이 이끌던 당 기구에 집중되었던 점증하던 보수세력에 의해 포위되었다. 1922년 5월 레닌이 발작으로 쓰러진 후, 트로츠키가 당의 중심적인 지도자로 레닌을 계승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스탈린, 지노비에프, 그리고 카메네프가 비밀리에 "트로이카"를 형성했다. 그들의 트로츠키에 반대하는 연합이 당에서 레닌주의에 반대하던 세력들이 정치권력을 찬탈하는데 있어서 중심이 되었다. 스탈린은 당과 국가 기구들 내의 보수적 관료층의 보호자와 대변인으로 등장했다.
대 러시아 배외주의적 폭정을 폐지하면서 권력을 장악한 볼셰비키는 레닌이 짜르의 "인민 감옥소"라고 불렀던 곳에 있던 모든 민족들에게 완전한 민주주의적 권리를 부여했다. 다른 수준의 민족적 통합을 이루고 있던 무수한 인민들의 해방을 위하여, 완전하게 형성된 민족들을 위한 연방 공화국들에서 다양한 민족들을 위한 자치주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수의 소비에트 공화국들이 수립되었다. 코카서스와 같이 상당부분 상호침투가 이루어진 인민들의 지역들에서는, 자치 지역들의 복잡한 정리의 결과 인민들 사이에 상호교류를 위한 국제주의적 구조가 수립되었다.
바로 이 코카서스에서의 민족 문제를 둘러싸고 레닌은 성장하고 있던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에 대한 첫 번째의 중대한 정치투쟁을 전개했다. 스탈린이 그루지아, 아제르바이잔, 그리고 아르메니아 공화국들의 주권적 지위를 부정하고 그들을 강제로 트랜스코카시안 연맹으로 편입시키려고 시도한 이후, 레닌은 1922년 후반에 스탈린과 결별했다. 레닌은 다가오는 1923년 4월에 열리는 12차 당대회에서 스탈린에 대한, 그의 한 비서의 말에 따르면, "폭격"을 준비하면서 트로츠키와 동맹을 맺으려고 결심했다. 하지만 레닌은 대회 개막 직전의 또 다른 발작으로 쇠약해졌고, 소비에트 당과 국가 업무들에 관한 그의 적극적인 참여는 여기서 끝나게 되었다. 레닌이 아프게 되면서, 트로츠키의 주요한 고민은 지도부 내부의 분리를 피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민족문제를 포함하는 핵심 주제들에 대한 그의 결의안들이 대회에서 채택되고, 스탈린이 총서기의 자리에 앉도록 하는 협상을 수용했다.("비판적 손익계산서: 트로츠키와 러시아 좌익반대파", 스파르타시스트 56호, 2001년 봄을 보시오)
1923년 10월 독일에서의 혁명의 패배가 결정타였다. 독일혁명의 패배는 세계적으로 부르주아지의 질서가 안정화되도록 허용하면서, 전후 혁명의 파도를 멈추게 했다. 이것은 소비에트 노동자들을 엄청나게 사기저하 시켰다.
소비에트 노동자들은 볼셰비키 독일과 함께 하는 공동의 혁명적 투쟁을 준비하기 위하여 전력을 다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제 처음으로 가까운 미래의 민족적 고립이라는 예상에 직면했다. 국제혁명의 지연이 남아있던 볼셰비키 당의 혁명적 중핵을 한 단계 한 단계 교살해나갔던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보수적인 관료집단의 상승이 가능하도록 했다. 트로츠키주의(즉, 진정한 맑스주의)는 레닌주의의 지속이다. 스탈린주의는 레닌주의로부터 나오지 않았다. 스탈린주의는 레닌주의에 반대하는 보수적 반동이었다.
1924년 1월 13차 볼셰비키 당 대회가 질적 전환점이었다. 이 대회에 이르기까지의 토론들에서, 트로츠키와 관료주의와 스탈린의 대러시아 민족주의적 배외주의 정책들에 대한 출현하던 반대파는 예상외로 광범위한 당내 지지를 받았다. 당황한, 그리고 노골적으로 혹평을 받았던 당 기구는 레닌과 트로츠키의 혁명적 중핵이 그들의 반대파들을 극복할 수 있었던 마지막 당 포럼에 대한 문호를 걸어 잠갔다. 이 대회에 대한 대의원 선거들은 트로이카에 의하여 트로츠키의 지지자들은 단 3명만이 참석할 수 있도록 조직적으로 농간을 당했다. 갓 태어난 관료집단은 반대파의 면전에서 너희들은 나가!라고 움켜진 주먹을 흔들었다.
대회에 참석했던 3명의 반대파 대의원들 중에 이반 브라체프가 있었다. 그가 13차 당대회의 현장에서 스탈린이 레닌의 당을 훼손시키고 있다고 비난할 때, 그는 반복적인 야유로 방해 받았다. 브라체프는 "동지들, 우리에게 완전한 민주주의는 이제 몇 시간 남지 않았습니다. 민주주의를 사용합시다!"라는 항의로 반격했다. 그가 옳았다. 그 시점 이후로, 소련을 지배했던 사람들, 소련이 통치되던 방식, 그리고 소련이 통치되던 목적들, 이 모든 것이 달라졌다. 관료집단이 자신의 지배를 강화하기까지 얼마간의 시간이 걸렸다. 스탈린 도당은 1930년대 내내 피의 숙청들을 자행해야만 했다. (여담이지만, ICL이 소련에서 했던 일들 중에 하나가 생존해 있는 트로츠키주의 반대파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반 브라체프를 발견했고, 그를 인터뷰했다.)
자신의 특권들을 지키는 가운데, 곧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필연적으로 볼셰비키 당의 맑스주의 강령에 반대하는 정치적 자의식을 획득했다. 소련의 지도부의 목적의 변화는 1924년 12월 스탈린이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로 알려진 경제적 자립과 고립주의의 잘못된 교조를 선전함으로써 세계 혁명이라는 10월의 기치를 짓밟았던 것으로 요약된다. 이론으로서,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는 어불성설이다. 노동자 국가는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계 경제를 무시할 수 없다. 계급이 없는 사회주의 사회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부르주아지 계급들을 몰수하고 집산화된 계획경제들을 수립하기 위한 사회주의 혁명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스탈린의 민족주의적 공식은 보수주의적 경향, 수년간의 전쟁, 혁명, 궁핍 이후 소비에트 사회가 성취하려고 갈망하던 안정화에 대한 잘못된 희망으로의 후퇴를 구체화했다.
크레믈린의 관료집단이 자신의 지위에 대여 더욱 많이 인식하게 되면서, 국제주의적 원칙에 대한 이 수정주의가 정치적 배신을 위한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외국의 공산당들은 점점 더 제국주의와의 "평화적 공존"이라는 허황된 시도 속에서 소비에트 외교정책의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수단으로 변형되었다. 다가오는 수십년 동안,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기회들은 하나씩 교살 당했다.
소비에트 당내에서의 반관료주의 투쟁이라는 가혹한 시련으로부터 등장했던 좌익반대파는 의심의 여지없이 레닌주의의 연속이었으며, 1917년 러시아 혁명에 대한 진정한 계승자들이었다. 소련 국내와 그들이 가능했던 한도에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모두에서 트로츠키의 좌익반대파는 러시아혁명의 성과들을 보존하고 확장하기 위하여 투쟁했다. 트로츠키의 1928년 저작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강령초안 비판"은 러시아 당에서의 투쟁이 소비에트 프롤레타리아트의 부활과 소련의 관료적 기형화에 맞서기 위한 투쟁이었을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시대의 혁명적 맑스주의인 볼셰비즘의 이론적, 강력적 유산을 보존하기 위한 투쟁이었음을 증명하였다. 그의1928년 "비판"을 포함하는 트로츠키의 레닌 이후의 제3 인터내셔널은 국제 트로츠키주의의 창립선언이다.
1933년 총알 한방 쏘지 않고 히틀러가 독일에서 권력을 장악했다. 당시에 자신들이 "제3기"로 명명했던 극좌 국면에 있었던 스탈린주의자들은 사회민주당을 "사회 파시스트들"이라고 불렀고, 히틀러의 권력을 향한 공세에 맞서기 위한 이 대중적 개량주의 노동계급 정당과의 공동전선 호소를 거부했다. 이 역사적인 패배와 스탈린화된 코민테른 내부에서 어떠한 반대의 목소리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평가서도 제출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직면하여, 트로츠키는 새로운 제4 인터내셔널의 창립을 주장했다.
파멸적인 극좌 노선 이후 스탈린 치하의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오른쪽으로 선회했다가, 1935년 7차(그리고 마지막) 코민테른 대회에서 자신들이 "인민전선들"으로 명명했던 계급협조적 연합들을 형성하는 정책을 공고히 했다. 당시 스탈린주의자들은 자신들이 "파시즘에 대항하여" 소위 "민주주의적" 부르주아지 당들과 단결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들의 배신적 정책을 정당화하려고 했다.
프랑스 사회당과 공산당들은 노동자들을 그들의 계급의 적에게 정치적으로 결박시킴으로써 1936년 프랑스 총파업을 배신했다. 1936-38년 스페인 혁명에서 1970-73년 칠레에 이르기까지, 인민전선은 프롤레타리아트 권력을 위한 모든 독립적인 노력을 훼손하는 것에 복무했고, 노동자들의 투쟁들을 무력화했으며, 노동자들의 투쟁이 패배하도록 했고, 종종 그것은 피비린내나는 패배들이었다. 레닌과 트로츠키처럼, 우리는 그것이 정부이건 야당이건 자본가 당들과의 어떠한 연합도 원칙적으로 반대하며, 인민전선 연합의 한 부분인 노동자 당들에 투표하는 것에 반대한다.
독일에서 스탈린주의자들의 배신과 그 뒤를 이은 개량주의적 인민전선 노선에 대한 코민테른의 성문화 이후에, 트로츠키와 그의 동지들은 1938년에 제4 인터내셔널을 창립했다. 1938년의 제4 인터내셔널의 이행의 강령은 스탈린 치하의 소련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래서 소련은 엄청난 모순들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소련은 여전히 퇴행화된 노동자 국가로 남아 있다. 사회에 대한 진단은 이렇다. 정치적 예측은 양자선택의 성격을 가진다: 노동자 국가에서 다른 어느 때 보다도 더 세계 부르주아지 계급을 위한 기관이 되고 있는 관료집단이 새로운 소유양식을 타도하고 나라를 자본주의로 되돌릴 것인지; 혹은 노동계급이 관료집단을 타도하고 사회주의를 향한 길을 열 것인지."
트로츠키의 강령은 이러한 모순들이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가에 관하여 지적한다: 제4 인터내셔널은 제국주의와 반혁명에 맞서 퇴행화된 노동자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인 군사적 방어를 위해 투쟁했다. 이것은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권력 찬탈이 10월에 의해 창출되었던 프롤레타리아트 소유양식을 타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적 반혁명이라기 보다는 정치적 반혁명이었다는 것에 대한 이해에 기초하고 있었다. 레닌이 가르침을 주었듯이, 핵심적으로 무장한 자들의 억압기구인 국가는 지배계급의 소유관계들을 방어한다: 부르주아지 국가는 자본주의적 사적소유관계들을 방어하지만, 노동자 국가는 집산화된 소유 관계들을 방어한다. 기생적이고 억압적인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정치적 지배하에 있는 소련은 관료적으로 퇴행화된 노동자 국가가 되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 정치혁명을 주장했다. 집산화된 소유양식들에 대한 방어에 기초한 이러한 혁명은 기존의 소유관계들을 전복하고 다른 계급을 권력에 올리는 사회혁명 혹은 반혁명이 아니다. 이것보다는 이것은 노동자 소비에트 민주주의와 10월 혁명을 이끌었던 것과 같은 트로츠키주의 국제주의 지도부를 복원하면서 관료집단을 타도하기 위한 정치혁명이다.
우리는 2007년 11월 10일 LA에서 있었던 러시아 혁명 90주년 기념식에서 빅터 기본스 동지가 했던 발표의 두번째 부분을 출판에 맞게 편집하여 아래에 싣는다. 이 발표의 첫번째 부분은 11월 7일자 노동자전위 924호에 실려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에 의해 창출되었던 세계 최초의 노동자 국가의 스탈린주의적 퇴행에 맞서는 투쟁을 지도하면서, 레온 트로츠키의 좌익반대파는 레닌의 볼셰비키 당의 혁명적-국제주의의 강령을 고수했다. 트로츠키의 제4 인터내셔널 강령의 핵심은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반혁명에 맞서는 소비에트 퇴행화된 노동자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인 군사적 방어와 소련에서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을 타도하고 노동계급 정치권력을 복구하기 위한 프롤레타리아트 정치혁명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1980년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쟁이 소련과 세계 역사의 운명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던 것으로 증명되었다. 1979년 12월에 레오니드 브레지네프의 크레믈린은 소비에트 중앙 아시아의 남쪽 국경을 따라 있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피보호 국가를 강화하기 위하여 아프가니스탄에 군사적 개입을 했다. 카불의 현대화하고 있던 부르주아지-민족주의 정권은 정권의 온건한 사회 개혁들, 특히 아프가니스탄 여성에 대한 엄청나게 억압적인 조건을 개선했던 사회 개혁들에 반대하여 무기를 들었던 미국에 의해 지원을 받고 무장되었던 반동적 이슬람 봉기에 맞서 소비에트에 도움을 반복적으로 요청했었다.
무시무시하게 후진적이었던 아프가니스탄에서, 적군은 사회진보를 위한 유일한 실질적인 기초를 의미했다. 적군의 승리와 지속되었던 아프가니스탄 점령은 소비에트 중앙아시아의 길을 따라서 이 나라를 변형시키면서 10월 혁명의 사회적 성취들의 아프가니스탄으로의 확장의 문제를 제기했다.
이 전쟁에서 소비에트 편에 서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어떤 좌익에게도 쉬운 일이었어야 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여성과 기본적인 사회 진보 양쪽 모두의 운명에 대한 방어뿐만 아니라 소련의 전략적인 남쪽 국경에 대한 방어를 위한 이 전쟁은 소련 쪽에서는 이중으로 진보적인 것이었다. 제국주의자들로부터 그들의 "좌익" 북치는 소년들에 이르기까지의 굳건한 전선에 맞서서 국제 스파르타시시트 경향(국제공산주의동맹의 전신)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아프가니스탄의 적군을 환영하라! 10월 혁명의 사회적 성취들을 아프간 인민들에게로 확장하라!"
1979년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적군의 개입은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라는 스탈린주의의 민족주의적 교조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우리의 국제주의적 노선은 CIA의 지원을 받던 무자헤딘에 단호하게 반대하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크레믈린 관료집단에 맞서는 정치혁명을 촉진하는 것이었다.
지미 카터의 "인권" 악선동을 시작으로 소비에트 "악의 제국"에 대한 로날드 레이건의 성전으로 강화되고 있던 미국 지배계급에 의해 계속 만들어지던 전쟁 히스테리의 맹공격 동안, 국제적으로 좌익들을 규정짓는 순간이 발생했다. 많은 좌익들이 역사상 최대규모의 CIA의 은밀한 작전을 환영하기에 바빴다. 제국주의의 종복들은 1979년에서 89년까지의 소비에트의 존재가 아프간 여성들을 위하여 이루기 시작했던 진정한 진보에 관하여 전혀 개의치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제국주의와 이 지역에서 제국주의자들이 대량생산했던 이슬람 살인자들의 승리의 행진에 의해 여성들이 생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진 것에 관하여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소련과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진보에 대한 미국 제국주의의 성전을 옹호했던 좌익들은 소비에트가 아프가니스탄의 소위 "민족적 권리"를 침해했다고 주장하면서 이에 대하여 피의 살육이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은 민족국가가 아니다. 아프가니스탄은 민족, 인종, 부족 그룹들의 혼합인 봉건주의로부터 파생된 국가이다. 그리고, 어쨌든, 이것은 핵심이 아니다. 아프가니스탄이 단일한 민족국가라고 하더라도, 맑스주의자들은 소련의 무장개입을 지지했을 것인데, 이것은 제국주의 자본주의에 맞서 소련을 방어하는 것을 포함하여 사회 혁명을 진전시키는 것이 민족의 자기 결정권이라는 부르주아지 민주주의적 권리보다 상위에 있기 때문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쟁은 분수령이었던 것으로 판명나게 된다. 1989년 스탈린주의 관료집단들의 배신적인 아프가니스탄 철수는 소련 자체 내에서의 자본주의 반혁명에 대한 직접적인 전조였다. 본인이 아래에서 설명하게 될 것처럼, 우리는 아프간 반동들의 격퇴를 돕기 위한 국제주의적 대응을 위해 투쟁했다. 우리는 모스크바에서 반혁명에 맞서 투쟁하는 것보다 제국주의에 맞서 그곳에서 투쟁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했고, 우리가 매우 옳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부르주아지 계급, 사회민주주의자들이 폴란드에서 반혁명을 부추기다
80년대 초기에, 파업 중이던 노동자들이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들, 카톨릭 성직자들, 그리고 친 자본주의 사회민주주의자들로 구성되었던 야당을 지지했었던 폴란드 사태에서 또 다른 반공산주의 공세가 벌어졌다. 노동계급의 중요부위들이 CIA,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자들과 바티칸의 지원을 받던 "노동조합"인 솔리다르노스크를 통하여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에 대항하여 투쟁으로 조직되었다. 미국과 서유럽에서 노동조합 관료집단은 솔리다르노스크를 위한 지원을 조직하는데 있어서 철저했다.
솔리다르노스크의 상승은 스탈린주의의 정치적 파산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폴란드에서 1956년, 1970년 그리고 1976년에 다시, 프롤레타리아트의 격변들이 관료집단이 매번 새로운 지도자나 혹은 보다 좋은 조건을 추진하면서 가로막혔다.
동시에, 폴란드 스탈린주의자들은 토지소유 농민에 대한 영속화 등을 포함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카톨릭 교회를 강화했다. 1970년대 후반이 되면서, "민족주의적 자유주의" 스탈린주의에 3번이나 환멸을 느꼈던 폴란드 노동계급의 중요 부위들이 솔리다르노스크로 조직되는 것에 순응하게 되었다.
1981년 9월 첫 번째 전국대회에서, 솔리다르노스크는 공공연한 반혁명의 강령으로 강화되었다. 솔리다르노스크의 "자유노조"에 대한 주장은 반소비에트주의 냉전의 함성소리였다. 스탈린주의자들이 지배했던 노동자 국가들과 관련하여, 우리는 관료적 통제로부터 독립되어 있고 노동자 국가와 노동자 국가의 집산화된 경제를 방어하는 원칙에 기초한 노동조합들을 위해 역사적으로 투쟁해왔다. 솔리다르노스크 또한 의회(Sejm)의 "자유 선거들"을 주장했지만, 이것은 의회정부를 가장한 자본주의 복구의 강령이었다.
우리는 솔리다르노스크를 CIA와 은행자본가들을 위한 어용노조로 묘사했다. 자본주의 복구에 맞서는 폴란드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인 군사적 방어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우리는 "솔리다르노스크 반혁명을 중단하라!"는 요구를 제기했다.
1981년 12월에 솔리다르노스크에 의한 권력장악 시도가 군장성 야루젤스키에 의해 가로막혔을 때, 우리는 노동자 국가를 방어하고 트로츠키주의 정당 형성을 위한 시간을 벌 수 있는 수단으로서 그러한 방책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했다. 반대로 많은 좌익들은 솔리다르노스크를 방어했다. 동시에 우리는 스탈린주의자들은 폴란드 노동자 국가를 자본주의에 팔아넘길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리고 정확하게 이렇게 되었다. 1989년에, 폴란드 스탈린주의자들은 그 해 6월에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했던 솔리다르노스크에 정부권력을 양도했다. 이렇게 해서 솔리다르노스크는 중부유럽과 동유럽에서 최초의 자본주의 복구주의 정권을 형성했다.
오늘날 폴란드에서 자본주의 반혁명의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 광업, 중공업과 섬유산업 등 폴란드 경제의 전체가 총체적으로 파괴되었다. 1989년 전에는 대체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던 실업이 20%를 맴돌고 있으며, 실업에 대한 수혜는 거의 없다. 여성의 권리가 후퇴했고, 반동적인 성직자 자본가 정부가 수립되었다.
ICL 그리고 자본주의 반혁명에 맞선 투쟁
소련이 2차 세계 대전 중에 나찌 침공으로 인한 완전한 파괴로부터 회복되어 산업과 군사적 강국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집산화된 계획경제의 우월성에 대한 추가적 증언이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경제는 생산성과 기술적 기초에서 필연적으로 선진화된 서구 자본주의 중심지들에 계속해서 뒤쳐져 있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소련은 군사적 포위와 소비에트 경제를 파산시키는 것에 목적을 둔 무기 증강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세계 시장의 압력까지 제국주의로부터의 끊임없는 압력들에 직면했다.
트로츠키는 스탈린주의 관료집단 하에서 광범위한 경제성장의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었다. 크레믈린 독재는 잔혹한 방식으로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과 심지어 전체 공장을 외국으로부터 이식하는 것을 통하여 소비에트 경제를 확대할 수 있었고 그렇게 했다. 그러나 크레믈린 독재는 기술과 노동 생산성의 전체적인 수준을 지속적으로 상승시킬 수 없었다. 트로츠키가 배반당한 혁명(1936년)에서 썼듯이 "국유화된 경제에서, 질은 생산자들과 소비자들의 민주주의, 비판의 자유, 그리고 주도성을 요구한다. 이것은 공포, 거짓말들과 아첨의 전체주의 정권과는 양립 불가능한 조건이다."
비록 계획 경제가 그것의 광범위한 성장의 기간에 자본주의적 무정부성에 대한 우월성을 입증했지만, 질의 필요성과 광범위한 발전이 전면에 등장하면서, 관료적 목조르기가 점점 더 경제를 침식했다. 1980년대가 되면서, 스탈린주의의 오경영과 기생주의의 축적된 결과들이 소련의 한때 폭발적인 성장률을 연간 몇%의 비율로 그리고 나서는 이것조차 없는 정도로 바꾸어 놓았다.
크레믈린의 관료계층은 더 이상 방어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는 동시에 전후 소비에트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의 꾸준한 향상을 유지하고 새로운 산업 기술에 투자를 할 수가 없게 되었다. 방침의 변경이 필연적이었다. 1985년에 미하일 고르바쵸프가 노동자 생산성과 기업의 효율성을 자극하기 위한 채찍으로서의 "경제 개혁들"의 강령인 페레스트로이카라는 슬로건으로 권력을 장악했다. 이것은 "개방"을 의미하는 글라스노스트 정책과 연결되었다. 소위 "시장 사회주의"를 통하여 소비에트 경제를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경제 운영을 위한 중앙계획으로부터 시장 기제로의 이행을 의미했다. 이것은 사회적 불평등들의 심화와 자본주의 복구를 밀어부치는 세력들의 강화로 귀결되었다.
이들 개혁들은 외교정책에서의 "신사고" 슬로건 하에서 제국주의와의 증가된 외교적 화해와 결합되었다. 1989년 초에 고르바쵸프 하의 소비에트 관료집단이 제국주의자들의 호감을 사겠다는 헛된 희망 속에 아프가니스탄으로부터 소비에트 군대들을 철수했을 때, 이후의 사태들이 충분히 확인해주었듯이, 우리는 이것을 아프간과 소비에트 인민들 모두에 대한 범죄행위로서 비난했다.
고르바쵸프가 소비에트 군대를 철수함으로써 아프가니스탄을 제국주의 늑대들에게 내던진 이유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군사적으로 패배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것은 CIA와 CIA의 미디어 합창단들에 의해서 생산되고 팔려나간 냉전 신화이다. 작전을 벌였던 제국주의들의 간첩들과 외교관들은 오늘날 무자헤딘 봉기의 절정이 1980년이라는 것에 쉽게 동의한다. 그때 이후, 이슬람 성직자들은 시종일관 "패배하고 있었고", "소비에트에 대하여 영토를 고수하거나 거부할 만큼 충분히 강력하지 않았다."(디에고 코르도베즈와 셀리그 해리슨의 '아프가니스탄으로부터: 소비에트 철수에 관한 숨겨진 이야기'로부터 인용).
아프간 딜레마와 씨름하던 군장성들과 당 지도자들의 정치국 기록들을 읽노라면 피가 끓는다. 고르바쵸프는 10월 혁명의 성취들을 아프간 인민들로 확장하는 것을 가로막았다. 권력을 장악한 조금 후, 그는 정치국에 대하여 "결국, 우리가 그곳에서 원하는 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다"라고 훈계했다. 1986년에 그는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에 남아 있고자 하지 않으며, [인도양의] '따뜻한 바다로 전진할' 의도가 없다”고 말했다. 고르바쵸프는 스탈린주의자들이 공유하고 있던 세계 혁명에 대한 거부를 환기시킴으로써 자신이 요구했던 수치스러운 퇴각에 화가난 사람들에 맞서고 있었다. 그러나 로날드 레이건을 달래기 위하여 아프가니스탄 대중들을 배신했던 자들은 고르바쵸프 개인만이 아니었다. 관료집단 중의 어떤 세력도 고르바쵸프의 소비에트 군사예산 삭감 시도와 제국주의를 달래기 위한 헛된 행위들에 대한 대안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고르바쵸프가 아프가니스탄에서 마지막 소비에트 부대들을 철수하기 불과 몇 일 전인 1989년 2월 7일에, 스파르타시스트 연맹과 연계되어 있는 계급투쟁적인 합법적이고 비종파적인 사회적 방어 기관인 파르티잔 방어위원회는 여성의 글 읽을 권리, 베일과 이슬람 성직자들과 지주들의 폭정으로부터의 해방, 의료보장의 도입과 만민교육의 권리를 방어하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투쟁할 국제부대를 조직할 것을 제안하는 편지를 아프간 정부에 보냈다.
불행하게도, 아프간 정부는 우리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대신에 그들은 아프간의 도시 잘랄라바드에서 CIA의 살인자들의 공격으로 인한 민간인 희생자들을 위하여 국제적으로 모금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우리는 이 대의를 받아들여 세계 전역으로부터 4만 달러가 넘는 돈을 모금했다. 이민자 공동체들에서, 공장들과 작업장들과 노동조합 사무실들에서, 그리고 외국인 학생들 사이에서, 무자헤딘의 승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하게 알고 있던 사람들이 많은 액수를 기부했다.
또한 우리는 제국주의자들의 정보봉쇄를 분쇄하는 것을 돕기 위하여 우리 조직의 특파원을 잘랄라바드에 보냈다. 이것에 관한 내용은 1989년-90년 노동자 전위 제본판에서 읽을 수 있다. 예를 들면, 1989년 9월 1일자 노동자 전위 484호의 "아프가니스탄: 내전의 현장들 - 우리 특파원으로부터의 특종 사진들"을 보시오.
만약 우리의 투쟁하는 국제주의자 부대 제안이 현실화되었다면, 이것은 자신들의 국제주의적 기여에 의해 사회주의적 열망들이 다시 불붙었던 소비에트의 아프간 전쟁 참전 병사들에 실질적인 충격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고르바쵸프의 배신에 대한 소련 내부에서의 실제지만 부분적이고 불분명한 반대를 자극도 하도록 도왔을 것이다. 반혁명분자들에 맞서 싸우기 위하여, "소비에트의 아프가니스탄 전쟁 참전자들이 자원자 부대의 형식으로 아프가니스탄에 다시 돌아가도록 허용해 줄 것을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요구했다(Suddeutshe Seitung, 1989년 7월 27일)"라는 보도들이 등장했다. 이러한 분위기가 특히 1917년 10월 혁명이 그들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구해냈었던 것과 똑같은 노예제에 맞서 아프가니스탄에서 전투를 벌였었던 중앙아시아로부터 돌아오는 소비에트의 참전용사들에 의해 감지되었다. 소련의 남쪽 국경에 있던 반동적 아프간 무자헤딘에 맞서 투쟁하는 것이 자신들의 국제주의적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라고 들었었고, 올바르게도 그렇게 믿었었던 소비에트 병사들이 이제는 소위 "러시아의 베트남"을 야기한 "전쟁 범죄자들"로 고향에서 비방을 들었다.
현재 우리는 고르바쵸프의 수치스러운 아프가니스탄 "철수"명령을 보여주는 정치국 회의 참석자가 보관하고 있던 신뢰할만한 기록들을 가지고 있다. 비록 결국에는 모두 고르바초프에게 굴복했지만, 이것은 정치국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들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만약 1989년에 소비에트 트로츠키주의 정당의 시작이 구체화되었다면 - 그리고 만약 우리의 부대들이 이것을 위한 촉매로서 복무할 수 있도록 도왔더라면 - 역사는 매우 다른 경로를 취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고르바쵸프의 굴욕적인 아프가니스탄 철수는 소비에트 대중들 사이에서 단지 패배주의와 사기저하 감정만을 가져다 주는데 복무했을 뿐이다.
중국에서 스탈린주의 정권에 맞선 프롤레타리아트 소요
1980년대 중에, 소부르주아지 민주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의 영향력이 동독의 두드러진 예외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동유럽 전역에서 점점 힘을 얻었다. 1989년 7월에, 고르바쵸프는 동유럽 블록 국가들에서의 소비에트 "간섭"을 거부했다. 동시에, 자신의 시장 재구성의 일환으로서 고르바쵸프는 이제는 소련이 경화로 세계시장 가격들로 동유럽의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들에 석유와 천연자원들을 팔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것은 더 이상의 보조는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고르바쵸프는 동유럽을 제국주의자들에게 제물로 바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동유럽과 소비에트 노동자들의 운명이 집산화된 경제들에 구현되어 있던 성취들을 방어하고 확대하기 위한 프롤레타리아트 정치혁명들인가 아니면 자본주의 반혁명과 전면적인 사회적 참상인가의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 정치혁명의 첫 번째 기미가 동유럽이 아닌 중국에서 나타났다. 1989년 5월-6월에,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에서 학생들에 의해 시작되었던 시위가 등소평의 "시장 사회주의" 경제가 야기한 점증하는 경제적 불평등들, 만연한 부패와 고질적인 물가상승에 분노하고 있던 노동자들 사이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획득했다. 지난 10년 동안 등소평 하에서, 농업은 탈집산화되었고 중앙경제 계획은 약화되었다. 노동자들의 "철밥통"이라는 평생고용 보장과 사회적 혜택들이 사라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청년 노동자들의 그룹들이 천안문 광장에서의 시위들에 합류했는데, 이것이 시위를 전국으로 확산시켰다. 당시 우리가 썼듯이, "시위들에 비중과 잠재적인 혁명적 성격을 부여했던 이것은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등소평의 강령에 반대하는 노동계급 소요의 시작들이었다"("중국 노동자들을 방어하라!" 노동자 전위 480호, 1989년 6월 23일). 처음에는 사병들과 일부 고위 군 사령관들이 시위들을 진압하라는 명령 수행을 거부했다.
군대가 계엄령 수행을 거부했던 2주일 동안이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당시에 정치적 진공이 발생했다. 특히 이 2주일 동안에, 아주 작은 중국 볼셰비키 조직이라도 있었다면 1989년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노동인민들이 자신들의 수중에 도시 통제권을 획득하기 시작하고 있던 그 정세는 정치권력을 위한 투쟁으로 발전되어야 했다. 등소평은 마침내 시위들을 진압하고자 하는 군부대들을 찾을 수 있었다. 진압은 학생 시위대들에 대해서 보다 노동 계급에 대해서 우선적으로 명령되었다. 혁명적 지도부의 부재가 1989년 중국에서 핵심적인 요소였다.
동독에서의 맹아적 프롤레타리아트 정치 혁명
중국에서의 사태들은 중앙유럽과 동유럽, 특히 독일민주주의공화국(DDR) 혹은 동독에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 곳에서의 커가는 위기가 10월 에리히 호네커의 스탈린주의 정권에 반대하는 매주 단위 집회 시위들의 증가로 귀결되었다. 고르바쵸프와 동독의 소비에트 군대 사령관들은 시위대에 맞서서 군대들을 사용해달라는 호네커의 요구를 거부했다. 호네커 정권은 10월 하순에 무너졌고, 아무도 이를 슬퍼하는 사람이 없었다. 11월 4일에, 동베를린에서 100만명의 강력한 시위가 벌어졌다. 5일 후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현재 우리는 당시 서독과 자본주의적 재통일을 옹호하기 위하여 달려나가던 모든 동독 인민들을 묘사하는 부르주아지의 선전에 끊임없이 시달리고 있다. 이것은 커다란 거짓말이다. 노동자, 학생, 병사 대중은 스탈린주의 지배자들의 파산으로 야기된 붕괴로부터 동독을 구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공산주의적 이상들을 위하여" 그리고 "특권들에 반대하여"라고 적힌 현수막을 들고 행진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우리는 우리 경향의 역사에서 가장 크고 가장 중요한 노력을 경주했었다. 그들이 독일어를 알고 있건 아니건 세계 곳곳으로부터 지원한 동지들이 독일로 날아갔다. 1989년 12월에, 우리는 거의 일간지나 다름없었던 Arprekorr[노동자 보도 통신]이라는 인쇄매체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우리의 구독자 써클들을 일련의 스파르타키스트 그루펜(스파르타시스트 그룹)으로 전환했다. Arprekorr은 자기 자신의 생명력을 얻었다. 동지들이 한 새로운 도시에 들러서는 우리의 통신과 리플렛들이 우리보다 더 빨랐다는 것을 발견하기도 했다.
우리는 유럽 사회주의합중국 속에 있는 붉은 소비에트 독일로 향하는 길로서 동독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 정치혁명과 서독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을 주장했다. 우리는 노동자와 병사 위원회들의 건설을 주장했다. 우리는 제국주의 서독과의 자본주의적 재통일에 무조건적으로 반대했다.
우리는 또한 선전과 슬로건들이 동독전국인민군대(NVA)의 병사들에게 향하도록 했다. 동독 군대의 일부 부대와 병사위원회들이 우리의 선전에 반응을 했고, 자신들의 막사에서 Arprekorr을 회람했다. 서독 부르주아지 계급과 미국 제국주의자들이 독일의 실지탈환주의를 조장함으로써 맹아적 정치혁명을 방해하려고 했다. 신나찌주의자들은 동독의 결정적인 군사력이었던 소비에트 주둔군의 병사들에 반대하는 도발을 선동했다.
봉기에 나선 독일 노동자들의 정치혁명을 위한 투쟁의 이름으로 소비에트 군 주둔지역에 있는 우리의 계급적 형제들에 대하여 환영의 인사들을 대량으로 배포함으로써, 우리는 처음부터 이러한 도발에 반대했다. 우리는 소비에트의 전통 노보고딘야야 욜카라는 새해 경축 파티에 합류하도록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그들을 초대했다. 또한 우리는 동독에 있는 쿠바, 베트남, 그리고 다른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인사들을 배포했다.
동독에 개입하고 있던 독일 사회민주당(SPD)은 자본주의적 재통일의 주요한 위장 말이었다. 또한 동독사회주의통일당(SED)이 자본주의적 재통일에 반대하는 투쟁의 핵심적인 걸림돌이었는데, 이것은 많은 인민들이 동독사회주의통일당이 동독을 방어한다고 하는 환상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래로부터의 압력에 직면하여, SED는 1989년 12월에 비상 당대회를 개최했고, 그들의 과거 이름에 민주주의적 사회주의 당(PDS)를 추가했다. 이제는 SED-PDS로 불리는데, 이들은 "이윤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를 반대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들은 동시에 시장지향의 개혁들을 주창했고, "연방적 구조들"라는 서독 수상 헬무트 콜의 강령을 칭송했는데, 이것은 실제로 동독을 자본주의 서독으로 통합하는데 기여했다.
SED-PDS 지도부는 공장 민병대인 Betriebskampfgruppen의 해산이라는 결정적인 행보들을 취했다. 이들은 SED 정치 지도부하에서 동독의 방어를 위해 자원한 공장에 기반을 둔 민병대였다. 관료집단은 1953년 7월 17일 스탈린주의자들의 지배에 대항했던 동 베를린에서의 친 사회주의 노동자 봉기 이후에 설립되었던 이들 무장부대들을 미래에 있을수도 있는 노동자 봉기에 대항하기 위하여 활용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Kampfgruppen의 많은 노동자들이 고분고분하게 이러한 방식으로 활용을 당하는 쪽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Kampfgruppen은 1989년 11월에 동독을 방어함에 있어서 관료집단에 맞서는 프롤레타리아트 정치혁명의 결정적인 지점이 될 수 있는 실제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스탈린주의자들은 이 부대들을 해산하고, 이렇게 해서 노동계급을 무장해제했다.
우리는 독일의 혁명적 재통일과 "동독을 팔아먹는 것에 반대!"하기 위하여 투쟁할 새로운 레닌주의 평등주의적 당을 호소했다. 우리는 "노동자 민주주의를 통한 효과적인 계획경제를 위하여"를 강조하는 한편으로 Arprekorr(1989년 12월 19일)는 소련에서의 노동자 정치혁명의 가능성을 주장했다.
"종종 마치 바보들처럼 자신들이 새로운 자본가 지배자들이라는 부드러운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사회민주주의자, 자본주의 복구주의자, 그리고 많은 지식인들로 이루어진 제5열에 맞서서,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과정에 있는 훨씬 커다란 규모의 결합된 경제가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이들 모든 목적들은 소련에서 필적할만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부활을 위한 정열적인 공세와 반드시 결합되어야만 한다. 간단히 말해, 서쪽은 보지 말고 동쪽을 바라보라!"
붉은 독일, 노동자 위원회들을 위한 투쟁!
이러한 전망의 정당성과 필요성은 곧 입증되었다. 12월 하순에, 신나찌주의자들이 동베를린의 트레프토브 공원에 있는 소비에트 기념비를 손상시키고 모독하는 것으로까지 나아갔다. 이 기념비는 나찌의 위협으로부터 독일을 해방시키는 과정에서 사망했던 적군 병사들을 위한 것이었다.
ICL은 이번 도발에 맞서는 통일전선 집회를 선도했다. 핵심적으로, 이것은 동독과 소련을 방어하기 위한 호소였다. 우리의 호소에 대한 반응은 깊고도 넓었다. 우리의 호소는 스탈린주의 지배자들이 1990년 1월 3일 집회를 위한 조직화에 합류하도록 강제했다. SED-PDS의 한 지도자인 로타르 비스키는 우리에게 "당신들이 노동자들을 보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말은 우리가 조직화된 노동자들을 우리의 대오들에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직) 아니다. 이것보다는 우리의 강령이 친 사회주의 노동자들의 열망들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트로츠키주의 당의 폭발적인 성장의 잠재력이 실제로 있었다.
집회 참가자들이 맹아적인 프롤레타리아트 정치혁명의 국면을 보여주었다. 트레프토브 공원은 25만이 넘는 노동자들, 동독과 소련의 병사들, 이주 노동자들과 학생들로 가득 찼다. 이 거대한 집회에서, 스탈린주의자들이 지배했던 소비에트 블록의 역사상 처음으로, ICL이 스탈린주의자들의 동독에 대한 배신들에 반대하는 자신의 트로츠키주의 강령을 발표할 수 있었다.
스탈린주의자들의 똘마니들에 의해 조직되었던 야유에 맞서서, 레나트 달호스 동지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SPD가 돕고 있는 서독 제국주의가 추구하는 단계적인 경제흡수와 정치적 합병은 이번 정치혁명을 사회적 반혁명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 이런 일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된다!...
"우리 경제는 낭비와 노후화로 고통을 받고 있다. SED 당 독재는 이것에 맞서 투쟁하는데 있어서 무기력함을 드러냈다.... 이러한 결정들을 하기위한 그리고 이 나라를 운영하기 위한 권력을 위한 투쟁은 다수를 만족시키는 합리적인 결정들에 도달할 수 있도록 반드시 노동자 위원회들의 수중에 있어야만 한다. 이것은 모든 인민들 앞에서의 공공연하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논쟁들을 통해서만 오직 이루어질 수 있다. 아마도 우리의 예가 소련이 같은 길을 선택하도록 용기를 북돋아줄 것이다."
우리의 강령은 대중들의 투쟁들 속에서 생생한 형태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많은 경우, SED-PDS 지도부가 당시에는 이것을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트레프토브 집회가 있기 수일 전에 여러 DDR 부대들에서 일련의 하극상이 발생했다.
고르바쵸프 또한 자신의 배신적인 관점에서 트레프토브의 역사적 중요성을 인식했다. 이후, 1999년 11월 8일에 그는 독일 TV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우리는 동독에서 벌어졌던 사태들의 충격 속에서 독일의 재통일 과정에 관한 관점을 바꾸었다. 그리고 특별히 결정적인 상황이 1월에 발생했다. 본질에 있어서, 구조의 붕괴가 발생했다.... 이것은 1월 3일에 시작하여 거의 매일 더욱 격화되었다.... 이것은 ... 마치 흘러가고 있는 불타는 용암의 분출 같았다."
모스크바에서 베를린까지 스탈린주의 배신자들은 더 이상의 혁명적 발전들을 저지하기 위하여 발빠르게 움직였다. 그들의 반혁명적 의도들에 대한 우리의 폭로에 으르렁거리던 SPD는 트로츠키주의의 정강을 공유하고 있다고 국영 TV에서 SED-PDS 지배당을 혹평했다. 굴복한 스탈린주의자들은 잽싸게 우리를 향해 정치적 공세를 퍼부었고, "금지된" 트레프토브와 같은 실천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고르바쵸프는 즉각적으로 헬무트 콜을 모스크바로 불렀다.
고르바쵸프는 자본주의적 합병을 위한 파란 신호등을 켜주었다. 서독 부르주아지 계급은 동독을 합병하는데 200억 독일 마르크를 쏟아 부었고, 동독의 화폐인 오스트마르크를 서독의 독일 마르크와 동등하게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수개월 만에 서둘러 동독 선거가 있었고, 모든 CIA 냉전의 정당과 그들의 대행자, 그리고 목사들이 트레프토브의 기치를 파묻기 위하여 서독으로부터 흘러넘쳐 들어왔고, 그 자리에 제4제국, 위대한 조국 독일의 깃발을 들어올렸다.
우리는 자본주의적 재통일에 대한 국민투표가 되었던 선거에서 투쟁을 계속했다. 스파르타키스트 그루펜(스파르타시스트 그룹)은 ICL의 독일 트로츠키주의 동맹과 통합하여 스파르타키스트 노동자 당을 만들었다. 우리는 1990년 3월에 동독 의회 선거에서 선거운동을 벌였다. 우리는 만약 어떤 조직이 분명하게, 공공연하게, 명료하게, 그리고 글을 통해서 자본주의적 재통일에 반대한다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우리는 우리가 출마하지 않는 곳에서 이들 후보자들에게 투표할 것을 우리의 지지자들에게 호소할 것이며, 이 조직은 자신들이 출마하지 않는 곳에서 우리의 후보자들에게 투표할 것을 자신들의 지지자들에게 똑같이 호소할 것에 관한 교환투표에 대한 합의를 제안했다. 어떤 당도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스파르타키스트 노동자 당만이 유일하게 러시아 혁명의 당, 제4제국의 자본주의적 복구에 맞서는 프롤레타리아트 정치혁명의 정당으로서 선거에 임했다.
선거결과는 트레프토브 이후의 반동적 전격작전의 승리였다. 아우쉬비츠의 부르주아지 계급이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 동독과 서독, 소련 그리고 전세계의 노동자들이 역사적 패배의 고통을 겪었었다. 그러나 역사는 또한 ICL만이 유일하게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알고 있었고, 그렇게 했다고 기록했다.
우리는 2007년 11월 10일 LA에서 있었던 러시아 혁명 90주년 기념식에서 빅터 기본스 동지가 했던 발표의 결론 부분을 출판에 맞게 편집하여 아래에 싣는다. 이 발표의 첫번째와 두번째 부분은11월 7일과 21일자 노동자전위 924호와 925호에 실려있다.
1989년 초에, 소비에트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쵸프가 아프가니스탄으로부터 소비에트 군대를 철수하면서 워싱턴에 굴복하고 있을 때, 우리는 CIA의 지원을 받던 무자헤딘에 맞서서 전투 중에 있던 카불 정권을 방어하기 위한 국제 부대를 조직할 것을 제안했다. 아프간 정부가 우리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한 이후, 우리는 최전선에 있던 아프간 도시 잘랄라바드의 민간인 희생자들과의 연대를 위한 캠페인을 정부의 제안에 따라 조직했다. 거의 동시에, 국제 스파르타시스트 경향은 국제공산주의동맹(제4 인터내셔널주의자)로 자신의 명칭을 변경했다. 우리의 잘랄라바드 캠페인과 명칭 변경은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하여 오랫동안 궁지에 몰려 짓밟히던 공산주의의 기치가 트로츠키주의의 진정한 투사를 보유했음을 의미했다.
그 이후 ICL은 DDR(동독)과 그 이후 소련에서의 자본주의 복구에 맞서는 투쟁에서 자신의 제한되어 있던 역량들을 동원했다. 이 기간에 우리는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반혁명에 맞서는 기형화되고 퇴행화된 노동자 국가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군사적 방어의 트로츠키주의 입장을 실천 속에서 적용하고 있었다. 동시에 우리는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에 반대하는 프롤레타리아트 정치혁명을 위해 투쟁했다. ICL은 트로츠키의 1933년의 권고("소비에트 국가의 계급적 성격")에 따라 실천했다.
"물론, 우리의 관점에서 관료집단에 의해 약화된 최초의 노동자 국가가 자신의 내부와 외부의 적들의 합동 공세들에 무너질 비극적인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가능한 최악의 경우에, 참상에 대한 죄인들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문제가 이후 계속될 혁명적 투쟁의 과정에서 엄청나게 중요하게 될 것이다. 혁명적 국제주의자들에게는 털끝만큼의 죄도 부과되지 말아야만 한다. 치명적으로 위험한 시기에 그들은 마지막 바리케이드에 남아 있어야만 한다."
1990년 독일에서의 맹아적 프롤레타리아트 정치혁명의 패배는 소련에서의 자본주의 반혁명의 전조였던 것으로 증명되었다. 벌어진 사태들이 수십 년 동안의 잘못된 지배가 중심적으로 집산화된 계획경제에 남아 있던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성취들들 방어하기 위하여 노동자들이 행동하지 않을 정도로 그들의 의식을 치명적으로 침식해왔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러한 결론이 미리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 스탈린주의 지배가 소련에서 붕괴했을 때, 갓 태어난 부르주아지 계급이 자본주의 국가를 강화하는 쪽으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노동계급이 정치권력을 위하여 투쟁하기 위한 기회를 활용할 것인가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10월의 프롤레타리아트 국제주의적 전통들을 교살하면서, 점점 더 대러시아 배외주의를 조장했다. 수십 년 동안, 스탈린과 그의 계승자들은 자신들의 민족주의적 전망을 소비에트 인민들에게 심는데 성공했다. 레닌주의적 프롤레타리아트 국제주의는 "트로츠키를 추종하는" 모호한 "이단자", "혁명의 수출" 혹은 기껏 해봐야 아무 내용도 없는 것으로서 공식적인 선전에서 경멸적으로 조롱당했다.
관료집단이 점점 더 불신을 받게 되면서, 반공산주의 러시아 민족주의 운동들이 반대에 대한 정치적 이완수단으로서 치밀하게 조장되었다. 우선 반공산주의 러시아 민족주의 운동들은 토착 문화 부흥운동의 위장막 아래에서 활동했고, 그래서 팜야트(추억)와 같은 이름을 가지는 식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문화 클럽이 아니었다. 이것은 반유대주의적이고 군주제를 옹호하는 흑백인조 파시스트 운동이었으며, 스탈린과 그의 계승자들이 양성했었던 것의 고약한 최종적인 결과였다. 1987년에 팜야트는 당시 모스크바 공산당의 수장이었던 보리스 옐친과의 면담을 요구하며 바로 칼 맑스 거리에 있는 크레믈린 입구들에서 공공연하게 그리고 뻔뻔스럽게 집회를 하는 것으로까지 슬금슬금 기어 나왔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옐친이 따뜻하게 그들을 맞아들였고 합법적으로 그들을 인가했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은 이후에 이어졌던 공격들에 대한 파란 신호등이었다. 처음부터 우리는 이들 흑백인조들이 대변하고 있던 치명적인 위험성에 관하여 경고하고, 소비에트 노동자들, 소수계들, 여성과 청년들에게 팜야트를 자신들의 쥐구멍으로 쫓아버릴 독립적인 행동을 취할 것을 호소했다.
동지들은 이것에 관하여 "팜야트: 러시아의 파시스트들이 고개를 쳐들다"(노동자 전위 434호, 1987년 8월 7일)에서 읽을 수 있다. 우리는 관료집단에게 팜야트를 분쇄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우리는 스탈린주의의 정치적 지배의 중요한 요소의 하나가 트로츠키주의 좌익반대파 등에 무력을 행사했던 반유태주의라는 무기임을 지적했다. 스탈린이 조국 러시아를 방어하기 위한 "위대한 애국전쟁"으로 표현했던 2차 대전 중에, 스탈린주의자들은 러시아 민족주의를 조장하기 위하여 유태인을 학살하는 러시아 정교회를 되살렸다.
볼셰비키 혁명은 레닌이 짜르의 "인민 감옥소"라고 불렀던 것을 다민족의 노동자 국가로 변형시켰다. 모든 민족들의 노동자들의 완전한 단결을 보장하기 위하여 모든 인민들의 완전하고 평등한 권리를 주장했던 볼셰비키의 국제주의적 강령만이 이러한 변형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민족주의적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에 의한 권력의 찬탈과 함께, 그리고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러한 원칙들은 왜곡되었다. 분명하게, 심지어 스탈린과 그의 후계자들의 지배하에서도 계획경제의 기초들은 소비에트 중앙아시아 공화국들과 같은 가장 억압당하고 가난했던 소수 민족들과 인민들의 엄청난 발전의 기초를 놓았다. 그러나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동시에 팜야트와 같은 반동적인 러시아 민족주의자들뿐만 아니라 다른 인민들에게 군림하기 위하여 소위 자신들의 민족성에 관한 "권리"를 주장하던 많은 비러시아 공화국들에 있던 소부르주아 민족주의 경향들을 키우는데 복무했다. 탈중앙화와 시장 세력들에 대한 호소를 담고 있던 고르바쵸프의 페레스트로이카가 보다 경제적으로 선진화된 공화국들이 더 많은 혜택을 챙기도록 하는 열망들을 부채질했다.
ICL은 소련의 국경들이 신성불가침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우리는 반혁명의 위장막으로서 복무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소련의 다양한 민족들의 분리하여 독립국가를 수립할 권리와 같은 자기 결정권을 옹호했다. 계급적 노선에 대한 우리의 고수는 우리가 반혁명을 위한 위장막으로서 “독립”을 주장했던 리투아니아의 사주디스와 같은 친제국주의 운동들을 반대했던 것을 의미했다. 사주디스는 또한 발틱에서 러시아 민족의 인민들을 사회적으로 배제하고자 했다. 사이비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자신들이 얼마나 반동적인가와 무관하게 분별없이 소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을 지지했다. 2차 대전 중에 나찌와 같은 편에서 싸웠었던 에스토니아의 숲 속의 형제들에 대한 어니스트 만델의 열광이 총체적인 예였다. 현재 서독에 존재하고 있는 것과 같은, DDR을 접수 할 수 있는 진정한 부르주아지 계급의 사회적 기반이 없는 민족주의는 소련에서, 그리고 동유럽에서는 더욱 자본주의 복구를 위한 주요한 추진력이 되었으며, 반혁명의 산물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소련의 분해는 파시스트와 민족주의 조직들의 부활과 함께, 동족산장의 민족 분쟁들과 자기민족 중심주의들의 유혈사태 물결의 목줄을 풀었다.
소비에트 노동자들과 접촉하기 위한 ICL의 최초의 시도들
1984년에 일찍이, 대통령 로날드 레이건이 소련에 대한 협박을 재잘거리고 있을 때, 우리는 우리의 핵심적인 문건들을 가진 한 팀의 우리 동지들을 소비에트로 보냄으로써 소비에트 시민들의 수중으로 우리의 선전을 전하기 위한 시도들을 했다. 1989년에는 서구를 방문했던 소비에트 상선 선원들, 여행 중인 발레리나들, 서커스 단원들, 그리고 많은 다른 소비에트 시민들이 항구들에서, 무대공연장 입구에서 혹은 다른 가능한 곳 어디에서든 우리의 "명의가 없는 서류봉투"를 배포하는 스파르타시스트 팀에 의해 환영을 받았다.
이들 소포들에는 우리 소개와 핵심적인 러시아어 판 트로츠키 저작들이 들어 있었다. 스파르타시스트(영어판1987년 겨울-88년 41-42호)에서, 우리는 러시아어로 트로츠키의 네 권 짜리 '좌익반대파 불리틴'를 선전했고, 트로츠키의 제4 인터내셔널의 1938년 이행의 강령으로부터의 핵심적인 발췌본을 다시 출판했다.
1989 겨울에서 1990년이 되면서 소련에서의 정치적 활동의 영역이 우리가 ICL의 이름으로 그곳을 여행하는 것이 가능할 정도로 열리게 되었다. 이 방문 동안, 소련 전역의 노동계급에 기반을 둔 운동들과 연계를 갖고 있던 노동자 통일전선(O.F.T)과의 회합은 멀리서 바라보았던 외관과 구체적인 현실 사이의 거대한 차이를 드러내주었다는 점에서 매우 유용했다. 우리가 2명의 O.F.T. 지도자들에게 팜야트를 분쇄하는 것의 필요성에 대한 그들의 입장이 무엇인가를 묻자, 2명 중 1명이 만약 O.F.T.가 팜야트에 반대하여 나온다면 자신들은 조직원의 절반을 잃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것이 70년 동안의 스탈린주의 대러시아 배외주의가 만들어낸 것이다! 우리는 즉각적으로 O.F.T. 사무실을 나왔다.
1990년 9월이 되면서 계속해서 정치활동의 영역이 열리면서 ICL(처음에는 마르타 필립스, 그리고 나중에는 나 자신)이 소련에 상주할 수 있게 되었다. ICL은 우리의 러시아어 잡지 Byulleten' Sparakovtsev(스파르타시스트 소식지)의 첫 번째 호를 1990년 10월에 출판했다. "트로츠키주의는 무엇인가"가 주요한 기사였다. 이것은 동독에 대한 우리의 개입을 위해 만들어진 팜플렛(트로츠키주의가 아닌 것과 트로츠키주의인 것)의 번역이었는데, 이 팜플렛에서 우리는 동유럽에서 "민주주의적" 반혁명을 지지하고 소련에서도 같은 것을 주창하던 사이비 트로츠키주의자들과의 명확한 차별화 속에서 볼셰비키주의의 혁명적 연속으로서의 우리의 진정한 트로츠키주의를 제출한다. 거의 같은 시기에 ICL은 대량 배포를 위한 러시아어 전단의 첫 번째 호, "소비에트 노동자들: 옐친/고르바쵸프의 500일 계획을 분쇄하라!"를 출판했다. 동지들은 당시의 노동자 전위의 제본판들과 특히 스파르타시시스트 영어판45-46호(1990-91년 겨울)에서 이들 자료들의 번역본들을 읽을 수 있다.
1990년 10월 우크라이나의 도네츠크에서 개최되었던 소비에트 석탄 광산 노동자 대회가 당시 소련에서의 정세의 좋은 보기였다. 도네츠크는 고르바쵸프가 위험성을 없애는 것에 성공했던1989년 전국적인 광산파업의 초점이었다. 그러나 계획경제가 분해되고 어느 때 보다도 시장의 혼란이 노동계급을 강타하자, 광산노동자들이 다시 가장 타격을 크게 입었다. 소비에트 광산노동자들의 절망적인 상황이 소비에트 석탄 노동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노동조합, 독립광산노조(NPG)를 만들도록 재촉했다. NPG를 조직하기 위한 이번 대회에 관한 소식을 알게되자마자 우리는 도네츠크로 가는 기차를 탔고 대회 조직가들에게 한 세트의 우리 인터내셔널과 러시아어 서적을 주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내빈 자격증을 발행해 주었다.
대회가 열리자, 우리는 부르주아지 계급의 모든 대행자들이 이 새로운 광산 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을 소비에트 버전의 반혁명적인 폴란드 솔리다르노스크로 만들고자 하는 희망으로 그곳에 있음을 발견했다. 미국과 영국 대사관의 사절단과 AFL-CIO의 자유의 집 대표자들이 가장 앞줄에 있었다. 이 그룹에는 CIA의 오랜 러시아 위장 잠입 "노동자"인 철저하게 히틀러를 추종하는 파시스트 러시아 연대주의자 전국 동맹(NTS)도 있었다. 2차 세계대전에서 히틀러의 편에 서서 싸웠던 "러시아 해방 군대"의 이 경멸적인 잔재들은 당시 반공산주의 사이비 트로츠키주의 영국 노동자권력(WP) 그룹과의 추가적인 공적인 도움 관계들을 가지고 소련 내부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의 NTS와의 연계에 관하여 완전히 잘 알면서, 노동자권력은 같은 해 7월에 NTS "석탄 광산 노동자" 유리 부첸코에게 영국을 여행시켰는데, 런던에서, 부첸코는 파업파괴자 영국 "민주 광산노동자 노조"(UDM)와 함께 연단을 공유했었다.
UDM은 1984-85년 위대한 영국 석탄 광산 파업을 분쇄하기 위한 시도 속에서 조직되고 자금 지원을 받던 반공산주의 조직이었다. 아서 스카길의 전국 광산노동자 노동조합(NUM)이 이 파업을 지도했다. 이 영국 석탄 광산 파업 동안에, 소비에트 광산 노동자들은 150만 영국 파운드에 이르는 대규모 연대 기금을 NUM을 위해 모금했다. 이 소비에트의 도움은 마가레트 대처의 보수당에 의해 지휘되고 네일 키노크[Neil Kinnock]의 노동당 "좌익"과 우익 양쪽 모두가 부추겼던 스카길과 NUM에 반대하는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색깔 공세에 대한 강력한 대항수단이었다. 5년 후에, "소비에트 광산 노동자" 유리 부첸코는 스카길이 NUM에 대한 소비에트 광산노동자들의 기부에서 천만 파운드를 도둑질 했다는 거짓말을 퍼뜨리면서 스카길에 반대하는 파업파괴자 UDM의 중상모략 공세를 지원하면서 영국을 돌아다녔다. 1990년 도네츠크에서는 "AFL-CIA"의 로드쇼가 소비에트 광산노동자들을 그들의 과거 스카길에 대한 지지를 거부할 것을 반공산주의의 이름으로 촉구하고 있었다. 이 대회에서 우리의 스파르타시스트 동지들이 단 2명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카길을 비난하는 것에 대한 UDM의 호소에 따르지 않도록 하는 대회의 결정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매일 밤, 우리는 소련 전역으로부터 온 광산노동자들과의 활기찬 토론들을 가졌다. 그 결과, 대의원들이 자신들의 광산 지역들로 우리의 소식지를 덩어리 채 가져갔다. 확실하게 NPG 최고의 층들은 옐친의 음모에 말려들었다. 그러나 이 창립대회 당시에는 여전히 기초가 유동적이었고, 지도자들은 외국으로부터 온 노동운동의 대표자들이 파업파괴자들에 관하여 이야기해야만 하는 것에 관하여 주목해야만 했다. NPG는 이미 확립된 제국주의자들의 창조물이 아니었다.
1991년 8월, 옐친-부시의 역쿠데타
1990년에 새롭게 선출된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의 수장 보리스 옐친은 친 서구 "민주주의자들"의 투사로서 등장했다. 그들에 반대하는 것은 군대, 산업 경영직과 소련공산당(CPSU)의 기구에 기반을 둔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소위 "보수주의자들" 혹은 "애국자들"이었다. 니나 안드레예바와 같은 그들 중 일부는 그들 스스로를 진정한 레닌주의자들로 불렀고, 그들 중 다수가 시장 혼란의 처참한 결과를 비난했다. 그러나 이들 "보수주의자들"은 집산화된 경제나 혹은 심지어 스탈린주의 구질서조차 보호하려고 하지 않았다. "민주주의자들"과 그들 사이의 주요한 차이점은 그들이 중앙집중화된 소련 전역의 국가 체계를 해체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이들 "애국자들"은 자본주의를 보다 천천히, 그리고 자기 자신들에게 더 많은 이득이 되는 경로들 통해서 도입하고 싶어했다.
1991년 8월 20일, 소비에트를 아우르는 "조약"이 체결되었다. 주된 변화는 정치, 군사, 재정 권력들의 소련의 중앙조직들로부터 소련을 구성하는 공화국 정부들로의 대폭적인 이양이었다. 이 지점에서 "애국자들"이 중앙집중화된 소비에트 국가의 약화에 저항했던 반면, 공화국들은 "민주주의자"들의 요새들이었다. 막판에 가서 1991년 8월 19일 아침 고르바쵸프의 군장교들 중 한 그룹이 국가비상위원회(EC)의 이름으로 크레믈린의 권력을 장악한다고 선언했다. 새로운 조약은 보류되었다.
하루종일 탱크와 장갑차들이 모스크바로 들어왔다. 나는 그것들 사이로 갔고, 병사들이나 그들의 사령관들 모두가 자신들이 무엇을 위해 호출되었는지에 관하여 조금이라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이유들에 관하여 잠깐 설명하겠는데, 국가비상위원회는 옐친에 반대하여 행동하라는 어떠한 문서상의 명령도 내리려고 하지 않았다.
불운한 국가비상위원회와는 반대로, 옐친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는 역쿠데타를 조직했다. 옐친은 국가비상위원회를 "공산주의" 체제를 복구하려는 시도로 비난했고, 그의 러시아 대통령으로서의 통치 본부였던 "대통령 관저" 주변에 바리케이드들을 쳤다. 미국 대사가 옐친과 친밀하게 소통을 하고 있었다
8월 19일 저녁에, 대통령 조지 부시 시니어는 (결정적인 때에 팔자 좋게도 자기 자리에 없었던) 고르바쵸프의 대역으로서의 국가비상위원회의 복무를 거부한다는 분명한 성명을 발표했다. 8월 21일 부시는 국가비상위원회와 전화통화를 했고, 그들에게 옐친이 자신의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국가비상위원회의 운명을 결정했다. 그들은 소련을 노동자 국가로서 보존하고자 하지 않고 있었고, 옐친과 마찬가지로 서구세력과의 "파트너 관계"를 위해 행동했다. 부시의 선언이 이런 희망들을 깨뜨렸다. 이것이 그들이 옐친에 대하여 어떠한 군사력 행사도 하지 않았던 이유이며, 그들의 "쿠데타"는 시작도 되기 전에 끝나버렸다.
모스크바 거리들에서의 반혁명
8월 19일 모스크바의 특권층 중심지가 옐친을 지지하여 모인 지식인들로 붐볐다. 3일 후에는 수천 명의 옐친을 지지하는 여피들의 환호 속에서,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에 건설되었던, 반혁명과 사보타지(Cheka)에 맞서 투쟁하기 위한 혁명적 전러시아 특별위원회를 조직했던 폴란드 출신 볼셰비키 지도자 펠리크스 져진스키의 동상을 미국 대사관에서 제공한 거대한 크레인이 끌어내렸다.
가장 역겨운 신성모독은 유대인이면서 1917-18년 소비에트 국가의 첫 번째 수장이었으며 볼셰비키 당의 중앙 조직가였던 아코프 쉬베르들로프의 동상에 대한 것이었다. 파시스트들이 그의 동상을 멀리 치웠을 뿐만 아니라 나무로 된 기독교 십자가를 동상의 기초에 박고, 동상 근처에 있던 나무를 완전히 불태웠다. 근처에 있던 칼 맑스의 동상도 역시 낙서와 오물로 훼손당했다.
마지막으로 하지만 이것이 중요한데, 사이비 트로츠키주의자들, 무정부주의자들, 그리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옐친-부시 반혁명의 뒤로 모여들었다. 이들 중 대다수가 소련에 있지 않고 마음으로만 옐친의 바리케이드에 있었지만, 그들은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이 공격을 환호하기 위하여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이들 파렴치행위자들의 목록을 세세하게 열거하는데 시간을 쓰기보다는, 1992년 9월 27일 노동자 전위 535호의 우리의 기사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아닌 배신자들 - 옐친의 반혁명을 위한 응원단"을 동지들에게 권한다.
그러나 문자 그대로 옐친-부시의 바리케이드들에 있었던 경향들 중에서 특히 하나에 관하여 언급하고 싶다. 현재는 사망한 테드 그란트가 당시 지도하던 투사경향[Militant Tendency]으로 알려진 영국에 기반을 둔 그룹이 그것이다. 현재 이 그룹은 피터 타페가 지도하는 노동자 인터내셔널 위원회와 알란 우드가 지도하는 국제 맑스주의 경향, 두가지 계승자들에 의해 대표되고 있다. 오늘날 이들 두 협잡꾼들 모두가 자신들은 옐친의 백악관 근처 어디에도 있지 않았다고 맹세한다. 그러나 내가 동지들에게 먼저 말했었던 타페 지지자들에 관한 노동자 전위 828호 기사에서, 동지들은 당시 공동 신문이었던 라보차야 데모크라티야(1991년 10월)의 1면 헤드라인들을 읽을 수 있는데, 여기에서 그들은 "모스크바에서의 바리케이드에서" "우리는 어디에 있었는가"를 떠벌이고 있었다. 8월 19일 중에, 국가비상위원회 구성원들은 사라지거나 병원에 입원하는 등의 행위를 하기 시작했다. 스탈린주의 지배의 최종적인 붕괴 국면에서, 관료집단의 단 하나의 세력도 옐친-부시 공격에 대항하여 투쟁을 하지 않았다. 정확히 그 반대였는데, 8월에 옐친의 백악관을 방어했던 공공연한 반혁명 깡패들의 다수가 붕괴하고 있던 공산당에서 떨어져나온 자들이거나, 심지어 여전히 공산당에 있던 자들이었다. 8월의 역쿠데타 전야에 선출되었던 옐친의 공공연한 친자본주의 러시아 정부의 부통령이었던 장군 알렉산더 루츠코이는 소련공산당 내부의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의 민주주의 당"이라는 분파의 수장이었다. 나중에 루츠코이와 기타 KGB 장성 알렉산더 스테르리고프와 같은 저명한 "애국자들"은 옐친 정부의 적들이 되었다. 그러나 1991년 8월에, 그들은 핵심적인 백악관 방어자들이었다. 옐친의 부통령으로서, 루츠코이는 1992년 항공관제사들의 파업을 분쇄했다. 옐친 정부기구의 4분의 3정도가 과거 소련공산당 우두머리들로 구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91년 8월: 프롤레타리아트 정치혁명인가 아니면 자본주의 반혁명인가
1991년 8월 보리스 옐친의 자본주의 복구주의자 세력들의 상승이 소련의 운명을 결정하는 하나의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결론이 났던 것은 아니다. 소련 국가 기구들이나 소련을 구성하던 공화국 정부들을 통솔하는 중앙 소비에트 정부가 더 이상 없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그리고 다른 지역의 정권들은 응집된 전국적인 자본가 계급들의 굳건한 기초에 의지하고 있지 못했다. 새로운 기업가들은 옛 당 관계자들, 소규모 투기꾼들, 그리고 마피아 깡패들 정도였다.
소비에트 무장 군대, KGB와 민병대와 같은 소련 국가기관들이 다양한 정도로 깨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옐친과 그 도당은 자본주의 질서에 헌신을 다하는 자기 자신의 세력들을 아직은 강화하지 못했었다. 즉각적으로 러시아어로 번역되어 소련 전역에 10만부 이상 배포되었던 우리의 1991년 8월의 기사, "소비에트 노동자들: 옐친-부시 반혁명을 쳐부숴라!"에서, 우리는 노동자들에 대한 투쟁으로의 조직화가 옐친의 바리케이드에 있던 반혁명적 오합지졸들을 쓸어냈어야 했다고 썼다. 이것은 당시 프롤레타리아트 정치 혁명으로 가는 길을 열 수 있었을 것이다.
"현재 옐친과 그 도당이 마음껏 강제적으로 신속한 자본주의의 재도입을 밀어 부칠 수 있게는 되었지만, 아직은 결과가 명확하게 결정된 것은 아니다.... 자본가의 공격의 참화에 대항하는 공장들부터의 반대가 반혁명의 급속한 강화를 ... 막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역사는 ICL의 요구를 옐친-부시 반혁명에 반대하여 처음으로 출판되었던 좌익의 항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혁명적 비타협성의 메시지였고, 낭낭하게 울려 퍼지던 실천에 대한 호소였다. 그리고 기사는 "파산한 스탈린주의가 자본주의 복구로의 홍수 조절문들을 열다"라고 참상에 대하여 책임이 있는 자들을 낙인 찍었다.
우리는 소비에트 노동자 국가가 존재를 멈추었다고 서둘러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이것은 이런 저런 방식으로 사태들에 의해 확증되어야 했다. 우리의 불충분한 힘이 허용하는 한도까지, 우리는 반혁명 세력들에 맞서는 노동계급의 행동과, 그리고 집산화된 소유양식을 지켜내기 위한 프롤레타리아트 정치혁명을 촉발하도록 돕기 위해 시도했다. 한편, 옐친은 급속하게 자본주의 국가기구를 강화하는 것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소비에트 군 사령부는 숙청되고, 해산되었으며, 반소비에트 자본주의 정권들을 방어한다고 맹세한 각 민족의 군대로 보직변경 되었다.
스탈린주의라는 반동적 유산
1992년 3월 7일, 1991년 8월 옐친의 쿠데타에서 패배했던 스탈린주의자들은 "'적'갈색 동맹"으로 러시아 파시스트들과 다른 우익 민족주의자들과 공식적인 연합에 돌입했다. 이것은 심지어 공식적인 "통합반대파의 창립 선언"에 성문화되었는데, 이 속에서 그들은 "우리 역사의 모든 국면들에서 발전했던 모든 정신적, 문화적 전통들"을 융합할 목적을 위하여 민족통일 정부에 합류한다고 약속했다! 서명자들은 "적색" 반대파와 "백색" 군주제주의자들, 그리고 파시스트들 사이에서의 어떠한 충돌도 진압할 것을 서약했다.
빅토르 앰필로프의 새로 창립된 러시아 공산주의 노동자당에서부터 고르바쵸프의 노동자들의 사회주의 당에 이르기까지, 실제로 러시아의 모든 저명한 스탈린주의자들과 사회민주주의 조직들이 짜르주의의 대러시아 배외주의를 소비에트 프롤레타리아트의 핏줄들에 더욱 주입하는 것에 있어서 파시스트, 성직자, 그리고 군사 "파트너들"에 합류했다. 1992년 6월이 되면서, "적갈색" 시위들이 광란의 지경에 달했다. 그들은 "유태인들을 쳐라, 러시아를 구원하라!"는 흑백인조 테러의 전통적인 슬로건을 외치면서 모스크바 텔레비젼 타워를 에워쌌다.
동지들은 이에 관하여 구 소련에서 우리가 배포했던 "스탈린주의 루저들: 민족주의 반혁명의 좌익"(노동자 전위 561호, 1992년 10월 16일)이라는 제목의 전단에서 더 읽을 수 있다. 동지들은 이 기사에서 "적갈색" 동맹의 늪에 있는 "노동당" 좌익 둑이라는 존재하지도 않던 활용영역을 두고 재빠르게 경쟁을 벌였던 투사경향 분리자들의 소련에서의 치욕스러운 기록 또한 발견할 것이다. 노동자 국가를 구하기 위한 어떠한 투쟁도 반대하면서, 그들은 배외주의나 반유대주의에 관한 어떠한 언급도 회피하는 호소들을 발행하면서 민중주의적 기업주의 음모들을 주창하려고 "적갈색"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압력을 추구했다.
우리는 인민의 지도자로서의 레닌주의 당을 위한 투쟁에 스파르타시스트 소식지[Byulleten' Spartakovtsev] 3호(1992년 봄)의 전체 지면을 할애하여 "적갈색"동맹을 폭로했다. 우리는 갈색의 자본주의 반혁명 풍조를 휘젓고 있던 모든 형태의 민족주의적 배외주의, 반유태주의, 그리고 반여성, 반 동성애의 편협함에 맞서 정치적으로 투쟁했다.
모스크바에 있던 우리의 지도적 대변인인 마르타 필립스 동지가 임무수행 중에 살해당한 것이 바로 이 시기이다. 그녀의 시신은 1992년 2월 9일 대규모 반옐친 집회 당일 아침에 동지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우리는 신중한 수사를 요구하는 국제적인 항의들을 조직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10월의 성취들을 방어하기 위한 마지막 바리케이드들에 ICL의 깃발을 꽂기 위하여 그녀의 목숨을 바쳤다. 동지들은 ICL의 3명의 여성 지도자들을 위한 특별판인 프로메테우스 연구소 시리즈 6권에 있는 그녀에 대한 많은 감동적인 헌사들, 그리고 그녀의 장례식에서 발표되었던 마르타에 대한 세계전역으로부터의 많은 감동적인 헌사들을 읽을 수 있으며, 꼭 읽어야 한다. 이것들은 노동자 전위 546-548호에 출판되었다(1992년 3월 6일, 3월 20일, 4월 3일).
옐친 정권에 대한 파업들과 항의시위들과 같은 노동계급의 저항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산발적이었고 효과가 없었다. 1992년 후반이 되면서 소비에트 군대나 어떤 다른 전연방 구조들이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갓 태어난 사회적 반혁명의 정권을 분쇄할 프롤레타리아트 정치혁명 대신에, 소련의 새로운 자본주의 국가들과 소국가들로의 해체가 살아있던 다민족 소비에트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구조를 해체했다. 스탈린주의자들의 정치적 삶에 대한 찬탈이 있고 거의 70년이 지나서, 그리고 현재는 CIA의 지원을 받는 친 옐친의 "자유기업노조"와 수많은 스탈린주의적 잔재들의 악의에 찬 배외주의적 독소들에 의하여 더욱 무력하게 된 다민족 소비에트 노동계급은 반혁명의 물결에 의해 압도당하게 되었다. 1991년 8월의 사태들(쿠데타와 역쿠데타)가 소련에서의 사태발전의 방향에서 결정적이었음이 궁극적으로 증명되었다. 일치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실천이 없는 가운데, 옐친 정권은 반혁명을 차츰 강화해갔다.
그 다음 해에 노동계급이 옐친에 반대하여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이 분명해졌을 때에서야 비로소 우리는 소비에트 노동자 국가가 명백하게 파괴되었다고 결론 내렸다. 1992년 가을에, ICL의 2번째 인터내셔널 대회는 "스탈린과 그의 계승자들의 퇴행화된 노동자 국가는 파괴되었"으며 "그러나 유약하고 되돌려질 수 있는 자본주의 국가가 수립되었다"고 결정했다.(스파르타시스트 영어판 47-48호. 1992년 겨울 - 1993년).
우리의 강령적 결론은 소비에트 노동자 국가는 노동자 정치혁명에 의해 부활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국제주의적 레닌주의-트로츠키주의 당이 지도하는, 옐친과 그의 세력들을 쓸어 없앨 새로운 노동자 국가, 혹은 새로운 노동자 국가들이 프롤레타리아트 사회주의 혁명을 통하여 건설되어야만 할 것이다.
우리는 소비에트 퇴행화된 노동자 국가가 파괴된 이후에도 구 소련에서 계속해서 우리의 활동을 했다. 아무리 우리의 강령의 올바름이 부정적인 방식으로 온전하게 증명되었다 해도, 역사적인 패배의 결과로 인해 우리는 대중적인 조직원 조직화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번 사태를 경험했고, 소중하게 얻은 교훈들을 미래를 위하여 간직하기 위한 우리의 단호함을 공유했던 예외적인 소수의 노동자 활동가들과 학생들을 조직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가능했으며,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었다.
1993년 도네츠크 석탄 광산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한 우리의 개입이 그 한 예이다. 이것은 새로운 자본가 정권들의 하나에 반대하는 최초의 거대한 노동자 행동이었다. 우리는 광산노동자들의 사회적 힘에 대한 직접적인 느낌을 받았다. 파업위원회들이 실질적으로 도시들 장악했다. 우리는 한 팀을 파견했고, 그들은 광산노동자들에 의하여 환영 받았다. 내 기억으로는 우리의 파견팀이 도네스크 석탄 광산 노동자들과 가졌던 무수한 정치적 대화들이 모스크바 지부 7년 동안 가장 흥미롭고 즐거운 것들이었다. 그들은 도시 광장을 점거하고 밤새 불침번을 돌았다. 우리는 ICL의 팜플렛 "어떻게 소비에트 노동자 국가는 교살당했는가"를 비출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광산 노동자들의 헬멧등 밖에 없는 상황에서 원을 그리고 앉았었다.
산전수전 다 겪었던 광산노동자들은 우리의 선전이 경제적인 문제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다고 높게 평가했다. 그들은 도네츠크 광산의 석탄 매장량이 거의 바닥이 났으며 자신들의 사회적 위기는 정치적 강령을 필요로 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무슨 강령을?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원하지 않고 있는가를 알고 있었다. 특히 한 광산노동자들의 집회에서 "민족주의는 통과할 수 없음!"이라는 현수막이 기억에 남는다. 동지들은 이 파업에 관한 극적인 이야기를 노동자 전위 578호와 579호(1993년 6월 18일과 7월 2일)에서 읽을 수 있다.
1993년 파업은 우크라이나, 특히 키에프에서의 ICL활동을 더욱 열어주었다. 1994년이 되면서, 지역의 좌익들을 양극화시키는데 있어서 우리의 성공이 청년 노동자 활동가들 사이에서의 조직화된 독자 써클들과 조직원 조직화의 시작으로 귀결되었다. 이것은 정확하게 우리가 기대하고 있던 종류의 성장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성공들은 신경질적인 미디어 비방을 쏟아내고 우리에 대한 법적인 억압을 가하기 시작했던 관계당국들의 관심을 유발했다. ICL은 공식적으로 우크라이나에서 불법화되었다. 우리는 국제적으로 그리고 구 소련 전역에서 정력적으로 이에 항의했다. 우리의 모스크바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모든 노동계급과 좌익 활동가들을 침묵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새로운 자본가들의 공세에 대한 국제적 연대의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는 우리의 합법성과 자본주의 반혁명의 참상에 맞서 투쟁할 노동자들의 권리를 방어하면서 국제적으로 집회들을 개최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승산 없는 전투였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사기저하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랜 기간 알란 우드의 러시아 지지자들인 세르게이 비에츠에 중심을 두고 있던 라보챠야 데모크라티야 같은 소위 좌익들이 다시 한번 자본가들을 돕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다. 그들은 우리를 겨냥하고 있던 마녀 사냥식 혐의들을 결과적으로 찬성하는 구역질 나는 편지를 실제로 우리에게 보냈다.
우리는 우크라이나로부터의 우리의 추방을 뒤집지 못했다. 이것은 우리의 소중한 신규 조직원들을 빼앗아 갔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국경 너머에 있는 중요한 통로를 잃게 했다. 동시에, 러시아에서 우리의 활동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이 너무 올라 유지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1996년 1월 21일 우리의 ICL 인터내셔널 집행위원회 전원참석회의에서 우리는 러시아에서 우리의 직접적인 활동을 중단할 것을 큰 슬픔으로 결정했다.
구 소련과 동유럽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들에서 반혁명의 지배권 장악은 전 세계 노동 인민들에게는 전대미문의 패배였다. 반혁명은 미국 제국주의자들이 더 이상 소비에트 군사력에 의해 제한을 받지 않는 "단일열강의 세계"를 창출했다.
반혁명의 승리는 구 소비에트와 동유럽의 프롤레타리아트들을 이론적으로 물질적으로 황폐화시켰다. 구 소련에서 대규모 빈곤화와 함께, 반혁명은 구 유고슬라비아와 구 소비에트 공화국 자신들 내부와 같은 구 동유럽 나라들에서의 "인종청소"라는 동족산장 전쟁의 물결들로 귀결되었다.
오늘날의 중국과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들
나는 동독과 소련에 대한 우리의 개입이 오늘날 우리의 임무들에 갖는 중요성을 지적하면서 결론을 맺고자 한다. 중국, 북한, 베트남 그리고 쿠바는 구 소련과 유사한 사회들이다. 친 자본주의적 노동조합 관료집단이 추종하는 특히 민주당과 같은 미국 정치인들은 중국 때리기와 배외주의적 보호주의를 부추긴다. 그들은 1949년 중국 혁명의 성취들을 파괴하고 중국을 다시 노예화할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중국과 북한에게 매우 중요한 핵무장 프로그램들을 포함하여 중국과 북한에 대한 무조건적인 군사적 방어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이유이다.
중국은 사회적 긴장의 화산이며, 곧 지배 관료 계층의 정치 구조를 산산이 부수면서 이 긴장이 폭발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는 프롤레타리아트 정치혁명인가 아니면 자본주의 복구인가의 선택의 문제가 강력하게 제기될 것이다. 이미 수만개의 노동자들의 항의시위들이 매년 벌어지고 있다. 레닌과 트로츠키의 그것과 같은 혁명적 국제주의적 중국 노동자 정부를 수립하는 중국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 정치혁명은 진정으로 세계를 뒤흔들 것이다. 이것은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관점에서 혁명적 맑스주의를 그것의 올바른 자리로 복구시킬 것이며, 혁명의 물결을 일으킬 것이다.
반면, 중국 인민공화국의 반혁명적 파괴는 그것이 구 소비에트 블록에 가져다 주었던 것보다 훨씬 더한 전쟁과 참상을 유발할 것이다. 모든 동아시아가 제국주의 열강들 사이의 재개된 투쟁의 장이 될 것이다.
이것들이 문제이다! 오늘날 우리는 작은 국제적인 혁명적 맑스주의 선전그룹이다. 우리는 우리가 통과하게 될 정치적, 조직적 국면들에 관하여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정세의] 조수가 다시 바뀔 것이며 미래의 노동자 혁명들이 볼셰비키의 정치적 무기를 필요로 할 것이라는 것이다. 중핵들은 반드시 10월 혁명의 경험, 초기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트로츠키의 제4 인터내셔널, 그리고 러시아 혁명의 당(!)인 ICL의 경험 속에서 단련되어야만 한다. 새로운 10월들을 위한 우리의 투쟁에 합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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